Anfernee Hardaway

[스크랩] 안타깝고 눈물나게 그리운 그 시절의 NBA 슈퍼스타

나비넥타이 2017. 1. 15.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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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그 이름


앤퍼니 '페니' 하더웨이


우리의 학창시절, 분명히 슈퍼스타는 마이클 조던이었습니다.


농구를 하는 애들이든, 모르는 애들이든.. 마이클 조던은 슈퍼스타이자 아이콘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이클 조던의 광팬은 아니라 말하고 싶습니다. 차라리 광팬이라 함은 데이빗 로빈슨의 광팬이었지요.


학창시절에도 일부러 키를 낮춰서 50번을 맞추려 했으니까요, 하지만 현실은 늘 무톰보(55)였다는...


하지만 제 플레이 스타일은 토니 쿠코치와 흡사하려 늘상 노력했고 또 무던히도 따라했습니다.


현실에선 토니 쿠코치가 절대 가드가 될 수 없었지요, 플레이 메이커라면 모를까, 절대 가드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낙생고의 정훈은 우리의 기대를 한껏 부풀려 놓았지만.. 결국은 음.. 음..


그런데!


그런데!!


그런 판타지스러운 스타가 나타났습니다. 1993년이었죠. 미시간 대학의 슈퍼스타를 위한 드래프트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는 은퇴할때까지 슈퍼스타의 기억만 가득한 몇 안되는 그런 특이한 슈퍼스타 였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앤퍼니 '페니' 하더웨이


혹자는 말했습니다. 진정한 거품이라고, 신인상+MVP+득점/어시스트/스틸... 가드가 취할 수 있는 포지션 마저도.. 딱히..


역대급 스탯도 없고 성적을 인상적으로 누적한 부분도 없기 때문이지요, 올스타전 4번 출전과 드림팀3, 루키 올스타 MVP정도?





하지만

우리 시대를 살아왔던 청춘의 넘버1은 페니 하더웨이 였습니다. 트레이시 맥그레디의 향수를 진하게 느끼는 세대는 아닙니다

저는 단언컨데 페니 하더웨이가 가장 멋지고 날렵하고 빠르고 멋진 가드였습니다.









그는 슈퍼스타였습니다. 포인트 가드였고 슈팅 가드였고 슬래셔였고 스코어러였고 플레이 메이커였습니다.


데뷔시즌 이후 그의 별명은 제2의 매직 존슨, 하지만 이내 제 1의 페니 하더웨이로 더 많이 불렸습니다.


신인때 페니와 샤크는 올랜도를 처음으로 플레이 오프에 진출시켰고 이내 동부를 넘어 리그의 강팀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게 불과 데뷔 3년안에 일어난 일입니다.그리고 파이널까지 진출하는데 딱 2년, 2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불세출의 슈퍼 울트라 스타인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를 뛰어넘습니다. 이때가 아마 페니의 가장 황금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MVP로써 점쳐졌고 샤킬 오닐의 인기에 범접하며 (혹은 뛰어넘었던)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의


대열에 오르게 됩니다. 비록 닉 앤더슨이 조던의 공을 뺏고 페니의 어시스트에 이은 호레이스의 덩크에 뭔가 모를


허탈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93~94시즌부터 96~97시즌까지의 페니는 그의 인생 최절정기를 맞습니다.


올스타전, 올 NBA팀, 루키 올스타전 MVP, 드림팀3 국가대표, 나이키와 계약 (에어 페니와 릴 페니는 폭발적 인기를 끌었죠)


이때까지만 해도 저는 매직존슨과 오스카 로버트슨의 자리를 위협하는 울트라 스타가 될 줄 알았습니다


페니는 드디어 샤크가 떠나버린 올랜도 매직의 NO.1이 됩니다. 그게 1996~97시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서졌죠


그리고 다시는 이때의 황금시절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리고 부상에 신음하는 대표적인 허약체질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3년뒤 평생 어울릴 것 같던 올랜도 유니폼이 아닌


피닉스의 유니폼을 입게 됩니다. 저는 그때가 마치 식서스에서 트레이드 된 바클리가 떠올랐습니다. 그 시절의 추억이죠


유일한 위안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가드였던 제이슨 키드와 페니 하더웨이의 만남이었습니다. 놀라운 현실이었죠




하필이면 왜 우리 큰형위로.... -_-;;





백코트 2000 (이 슈퍼스타 가드 조합을 밀레니엄에 빗대어 이렇게 불렀죠) 이 가동하면 누구도 쉽게 보지못하는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습니다. 그둘이 동시에 뛸 당시의 선즈는 무려 73%가 넘는 승률을 자랑했었습니다. 대단한 백코트였죠


하지만 밀레니엄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페니는 사라졌습니다.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리그의 슈퍼스타는 티맥이었습니다


저 역시 티맥2 로우를 신고 농구코트를 여전히 달려댔지만 너무나 안타까운 스타였습니다


저에게 있어 페니의 데뷔이후 4년은 그 어떤 선수의 데뷔이후 4년보다 강렬하고 임팩트가 있었습니다. 그랜트 힐이


부상에 울었던 아쉬운 선수이긴 하지만 페니의 향수는 그 몇배는 더 이상 강렬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잊혀진 한물간 선수로 취급당하며 듣보의 흔적만을 남기고 있을 때 충격적인 소식을 접합니다




유니폼을 입은 그의 모습은 언제나 멋지지만.. 뉴욕의 1번은 정말 어색했습니다. 그리고 별일없이 벤치워머로


전락한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쳤죠. 그리고 그는 은퇴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색한 모습은 계속 연출되는데.. 눈을 의심하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역시 핫이슈 메이커 페니의 모습은


어디가지 않았습니다. 먹튀계의 대명사로 이름을 굳혀가려는 찰나에 저가의 계약으로 마이애미에 합류하게 됩니다


거기엔 전성기를 함께 보낸 옛 동료 샤킬 오닐이 있었습니다.



늘 생각해 봅니다. 무릎 부상이 없었던 페니라면.. 어떤 활약을 했을까..


발목이 쌩쌩한 그랜트 힐 보다, 등 부상을 당하지 않았던 데이빗 로빈슨보다..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는 선수인건 틀림없습니다











제 기억속에는 영원한 슈퍼스타 페니였지만, 제 청춘의 시기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사람이기도 했었죠


이제 페니는 농구하던 동호회 친구들끼리의 술안주가 된지 오래고 이 시절의 NBA 농구를 잘 모르던 동생들에게


들려주곤 했습니다. 매직 존슨보다 빠르고 어쩌면 더 다재다능했고 마이클 조던만큼 잘생기고 농구잘하는 201cm의


포인트가드가 있었다. 아는 5살 터울의 동생이 "형, 션 리빙스턴이 있잖아요~" 하길래, 피식 웃으면서 말해줬죠


"야 조혜련(리빙스턴)이 아무리 힘이 쎄도 론다 로우지를 이길 수 있겠냐? 그 시절 페니는 론다 로우지 이상의 인기였다


(그리고 거품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실력만큼은 아만다 누네스 (조던?)에게 졌지만 인기는 몇백배 차이나지 않느냐"


누네스(마이클 조던;)은 론다 로우지를 철저히 박살내 버렸었죠, 96년 시카고는 전년도 패배를 스윕으로 갚아줍니다




그리고 페니(로우지의 UFC)는 NBA의 인기를 범 세계적으로 또 한단계 끌어올린 시대의 아이콘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4년의 NBA생활을 마치면서 (좋은 꿈을 꾼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의 기억에서 멀어질 시간이 왔다


감사했다, 그리고 잊지 않겠다)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코트에서 사라졌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슈퍼스타 였습니다









출처 : I Love NBA
글쓴이 : 고기굽는 데이빗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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