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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리그 최고의 전사, 그가 바로 답이다. - The Answer 3 (2)

나비넥타이 2012. 7. 27. 15:17
 
* 드리는 말씀....
갑작스레 나타나 긴 글을 올리니까 많은 분들께서 개인에게 보내 달라고 하시는데~
저 느바 오덕은 맞지만 잉여는 아녜요~ 힝~! ㅎㅎㅎ
어디로 글을 가져 가실 분들께서는 출처만 밝혀주신다면 언제든 펌 환영입니다.

 
 
 
리그 최고의 만신창이, 그는 전사이자 답이다.
그의 신장은 리그에서 손 꼽히는 작은 것이지만 공에 대한 열정은 리그 그 누구보다도 큰 것이었다.

 

 사진 속의 숫자는 바로 그의 부상횟수와 부위를 표시한 것이다. 그는 군인인가?

 
그의 우승 경력이 아쉽지만 그는 리그 안팎에서 농구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명예를 다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타들을 위한 스타 그 이름도 찬란한 미국의 영웅..... Michael Jordan
                                                                                         A.I의 모티브가 되었던 그였기에....

 
Allen Iverson에게 농구라는 운동에게 영웅이 있다면 Kobe Bryant와 마찬가지로 Michael Jordan이었다. 이는 매번 그의 인터뷰에서 회자되던 사실로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누구나 MJ를 꿈꾸기 마련이었을테니까 말이다.
 
누구든 Jordan과 같이 되고 싶을 겁니다.
돈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가 사랑하는 농구에서 그는 대명사 같은 존재입니다.
농구라는 명사에선 반드시 나오는 대명사죠, MJ는...
 - 이열~ 완전 멋진 표현!!! 2003 espn과의 인터뷰中
 
 
 
마이클 조던이 팀 동료들에게 Janet Jackson을 쉽게 소개시켜 주었던 시대,
언급했듯 MJ는 리그를 평정할 수 있던 최고의 실력으로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NBA가 낳은 최고의 스타이자 미국 사회가 지목한 8,90년대의 최고의 영웅이었다.
 
 
 걸프전의 이해 관계와 맞물려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던 그 시기, 많은 국가들이 미국을 근대의 로마제국이라 비판하였지만 미국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Pax Americana(미국 우월주의에서 출발한 영웅주의- 영웅은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그 영웅은 자랑스러운 미국(인)이다.)라는 이념으로 자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정치,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시켰다. 그때 많은 걸프전의 희생자보다도 더 홍보가 쉽고, 위대함을 드러낼 수 있던 자가 자연스레 영웅이 될 수 있었는데 그 인물이 바로 Michael Jordan이었다. 당시 그는 Gatorade와 Mcdonald's의 광고에서 <National Hero / American hero : 국민영웅>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미국민의 가장 인기있는 음료중 하나인 Pepsi 계열社의 Gatorade 안의 MJ는 음료의 상징이자 미스포츠의 상징이 되었다.

 
세계 치안을 위한 경찰국가라 자칭하며 모든 평화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애국심 고취를 강조하는 미국에서 영웅이 되려면 적어도 전쟁터에서 산화되거나 굉장한 위험 상황시 모두를 살려내야하는 Risk를 걸어야 하는 것이 사회적 통념인데 비해서 농구 하나만으로 영웅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MJ의 위상은 곧 NBA의 위상이기도 했다.
 

 

 

한때 NBA = MJ, MJ = NBA라는 식의 발상이 가능하던 시기가 있었다.

 

 

미국의 많은 스포츠 리그(하다 못해 비인기 종목인 Lacrosse까지 포함하여도) 중에 리그 vs 선수 개인으로 경쟁 구도를 펼칠만큼의 압도적인 실력과 능력을 갖춘 이는 전무후무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뛰고, 날아도 훌륭한 선수를 모아 놓은 프로스포츠에서 군계일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다가 올스타 중에서도 혼자 더욱 더 빛나기는 거의 로또 세번 연속 1등되서 해외여행 가다가 비행기 추락해서 살아남기보다 더 힘든 일이기에 -_-;; MJ의 등장은 적어도 NBA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올스타 중에서도 혼자 빛날 수 있는 선수였다. 더군다나 그는 Wilt Chamberlain이라는 위대한 스포츠의 전설보다도 더 많은 신체적 결함(단신-_-;;으로 지극히 평범한 신장의 SG, 물론 리그에서는 꽤나 장신 SG였지만 그렇다고 리그 전체를 통틀어서 절대적인 신체적 우위를 가졌다고 할 수는 없겠다.)을 가지고도 리그를 지배했다는 점에서 리그와 사회는 그의 영웅화에 혈안이 되었다.

 
 
 
당시 미국의 4대 스포츠중 야구와 하키를 제끼고, 농구가 2위가 되었다는 사실은 두 종목에게는 좌절과 충격을, NBA와 사회에는 신선한 설레임을 전해주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러한 MJ는 실제로 미국민을 위한 영웅이었고, 확장을 꿈꾸던 NBA의 홍보수단, 그 자체이기도 했다. 이에 많은 국민들 뿐만 아니라 연예인들 또한 너, 나할 것 없이 MJ를 외치며 그와 친해지기를 꿈꿨고, MJ는 연예계와 정치계, 사교계까지 이을 수 있는 인맥, 그 자체가 되었고, 문화 트렌드로서 공부되는 연구대상이 되었다.
 
 
 
 
당시 많은 선수들의 말을 빌어봐도 MJ는 위대함, 그 자체였다.
"당시대의 대표적인 인기가수였던 Janet Jackson을 곧장 통화시켜 줄 수 있는 인물"은 어느 스포츠를 막론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자신의 신발을 리그(미식축구, 야구, 하키복장 etc)의 다른 훌륭한 선수들에게 신기는 것도 모자라 다른 종목의 스포츠 스타들에게까지 신게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NY Yankees의 유격수, Derek Jeter의 신발, AirJordan 1, 3

 
"내가 Air Jordan과 계약할때 얼마나 기뻤는지 아십니까?
 
나는 Air Jordan을 신고 싶어 농구를 하고 싶었지만 난 정말 농구에 형편없었어요.(I sucked Basketball.)"
 
- Derek Jeter, New York Yankees
 

 

Air Jordan Retro 4, Eminem special edition, only 50 pairs released.


선택의 여지 따윈 Air Jordan과 계약할때는 버려도 됩니다. 내가 가난했을때부터 내 소원은 그의 신발을 신는 것이었죠.
- Rapper Marshall Mathers, a.k.a EmineM

 
 
 완벽한 문화 아이콘, 그것이 바로 Michael Jordan이었다.
그는 미국 문화의 길이자 진리였으며 모든 문화의 지름길과 같았다. 농구는 부흥했고, 그는 부자됐다. 
Michael Jordan은 미국 문화 아이콘으로서 사회에 깊이 자리 잡으며 작년까지 20여년간 약 8억 9천만 달러(한화 계산시 대략 9,000억원)으로 스포츠스타중 두번째의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ㅡ Financial times, 2007
p.s 스포츠 부호 1위는 F1의 Michael Schumacher로서 한화로 대략 1조2000억,
2위는 Tiger Woods와 MJ가 나란히 한화추산 1조원이라고 조사되었으나 조던은 곧 위자료로 1400억을 지출했고,
Woods는 그보다도 더 많은 돈을 와이프에게 지출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역시 남자에게 바람은 좆 to the 망으로 가는 지름길... -_-;;
 
 

 

Jordan이 여기서 산다...

조감도라서 이리 보이지, 필자가 Illinois에 있을때 이 집을 지나간 적이 있는데 23이 크게 적힌 대문 말고는

그저 정글 같이 숲으로 울창했더랬다. 그나저나 조던집 스쳐가는 것만으로도 감격이었다. -_-*

 

 
 
 
 
 

리그가 사랑한 영웅, MJ와 리그가 미워한 영웅, A.I의 다른듯 같은 행보...

 

 

이 친구, 굉장히 다이나믹하네요. 최고가 되기까지 몇년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 MJ,  sportsillustrated

 


 리그가 드레스 코드를 만들고 저급한 흑인 갱문화의 대표가 될 법한 선수가 바로 A.I였다.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던 천하의 Janet Jackson도, 위대한 Diva였던 Mariah Carey도 MJ의 친구이고 싶은 팬이었다. 수많은 동, 서부 랩퍼들은 MJ를 영웅으로 묘사하던 시기가 지났고, 문화계를 통해 NBA의 중흥을 이끌 선두주자의 대세는 단연 Allen Iverson이었다. 답이 없는듯 보였다. (당해 많은 이들에게 Philladelphia의 Lowa Marion HS의 최고의 ace였던 Kobe는 포텐셜 가득한 풋내기로만 보였나보다.)
 
 
 
Michael Jordan은 실력과 이미지 그리고 사회적 명성을 통해서 친해지고자 했던 많은 친구들이 생겨났다면
Allen Iverson은 연예인들도 좋아하고 흉내내고픈 그의 탁월한 외적인 스타일과 그의 반항적인 이미지로 하여금 많은 친구들이 생겨났다.
둘의 상반된 이미지(MJ = 모범적인 위대함 / AI = 반항적인 쿨함)은 다른 종류의 친구를 리그의 부흥 도구로 만들어냈는데 MJ의 친구들은 NBA가 환영했다면 AI의 친구들은 NBA가 꺼려했던 쪽에 가깝다.
 
 
 
 MJ의 친구를 자청하는 저명인사 중에는 크게는 Bill Clinton 당시 미대통령부터(대통령이 농구선수와 친구라고 칭한다는 것은 극히 이레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을 포함한 상당수의 정치인들, 당시 pop계의 디바라 할 수 있던 Janet Jackson, Whiteny Houston, Mariah Carey, 문화계의 거장인 Spike "Small" Lee 감독, Will Smith, Martin Lorenz등의 유명 영화배우, 게다가 유명 운동 선수들, 그리고 각계를 아우르는 동서부의 랩퍼들까지 각기 각층에서 모였고, 그들은 NBA의 유명세를 알리는 도구로, MJ의 친구로서 자신의 홍보를 할 수 있는 이해 관계마저 MJ를 통해 생겨 났다.
 
 
 
 그중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당시 절대적이던 NFL(미식축구리그)의 인기 선수들은 NFL을 스폰서하던 Reebok에서 협찬받는 신발보다는 AJ를 스폰서로 두고 싶어할만큼 MJ의 인기가 어마어마했다는 사실과 90년대의 동, 서부 랩퍼들간의 불화 속에도 그들은 MJ만은 하나같이 인정했다는 점이다. (그, MJ는 어찌보면 유명인사 사이에서도 거물 인사였던 셈이다. 이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효과도 있었지만 당시의 MJ의 리그 장악력을 반증하는 사실이기도 했다.)
 
 

 

 

21세기의 힙합문화 리더는 누구였는가?
그저 The boss, Mr. Roca Fella, Jay-z라고만 해야 하는가?
혹시 A.I는 아닌가?

 

 


A.I의 팬이자 친구들(상,하로..)
DJ, DJ Clue은 현재 세계 최고의 래퍼 Jay-Z가 제일 신뢰하는 뮤지션으로 둘은 Backstage란 앨범을 내기도 했다.
R&B performer, Jagged Edge, 그들은 랩과 R&B를 다 소화하는 인정받는 뮤지션들이다.
His Best Friends, Carmelo Anthony and Lebron James
rapper, Big Tigga
rapper, Dennis Da Menace

 

 

 NBA 사무국이 필요했던 흥행의 모든 요소들을 갖추었던 MJ와 그에게서 파생되어 나오던 좋은 영향들(모범적인 각계 인사)은 MJ의 은퇴와 함께 한풀 꺾였다. 아니, 그 영향은 MJ를 끝으로 끝났다. 그리고, 게토레이, 나이키, 맥도널드의 주가도 추락했다. 그리고, 리그를 지배하는 새로운 문화 아이콘이 데리고 들어온 친구들은 NBA 사무국이 제일로 싫어하는 힙합문화 트렌드 리더들이었다. 사무국은 격렬히 제약하며 그들의 입성을 반대했다. 허나 A.I의 인기는 데뷔 시즌만큼이나 파급효과가 컸고, 리그는 A.I와 그의 친구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입단 당해전까지만 해도 최고의 라이벌로 비교받던 Minnesota TimberWolves의 최고의 공격형 포인트가드였던 Wtephon Marbury는 비록 A.I와의 첫경기에선 이겼으나 경기력에서도 A.I에게 밀렸다는 평가를 받았고, 다음 경기에 A.I에게 30득점 9어시스트를 빼앗기며 패배를 맛보며 A.I의 라이벌이라는 타이틀마저도 잃어야 했다.

 

 

 

 

그는 Rookie Season을 가장 무난하게 마친 96 draftee중 하나였다. 그의 최종 스탯은 64경기 선발출장 포함 총 67경기 출장, 평균 15.8점, 7.8어시스트, 2.7리바운드, 1.0스틸등 가장 고른 활약을 한 선수중 하나였으며 당시 가드로서는 보기 드문 굉장히 공, 수 능력의 조화를 이루던 선수였다. (당시 리그 최고의 가드라 하면 레젼드 존스탁턴을 포함, 새로운 강자 Penny Hardaway, 미치 리치몬드, 로드 스트릭랜드, 제이슨 키드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비와 눈이 많이 오는 Minnesota를 떠나 New Jersey, Phonix, Newyork을 거치면서도 마지막 세시즌을 맞이하기 전까지 20.8점, 8.6어시스트를 해주는 최고의 공격형 PG였다. 하지만 아이버슨만큼이나 안타깝게도 그의 말로도 중국에서 꽤나 초라해졌다.)

 

당시 루키들의 활약을 살짝 들여다 보자면

Marcus Camby - 14.8점, 6.3리바운드, 1.5어시스트, 1.0스틸, 2.1블락

(그의 통산 득점은 10.7점 득점수준은 빈곤해도 그의 통산 평균 리바운드는 13.3개, 블록 3.0개로 아주 훌륭하다.)

 

Ray Allen - 13.4점, 4.0리바운드, 2.6어시스트, 0.9스틸

(허나 그는 오히려 리그에 잘 성장하여 통산 21.1점, 4.5보드, 3.9어시스트, 1.2스틸등 전부문에서 비약적인 도약을 이끌어 냈다.)

 

Kobe Bryant - 7.6점, 1.9리바운드, 1.3어시스트 (그는 코비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Steve Nash - 3.3점, 1.0리바운드, 2.1어시스트, 0.3스틸

(14.3점, 11.1어시스트, 3.5리바운드, 0.6스틸, 48.5%의 야투율, 그는 2연속 리그 MVP였다.)

 

Antonie Walker - 17.5점, 9.0리바운드, 3.2어시스트, 1.3스틸, 그의 신인 시절 포스는 현재의 준척 이상의 빅맨 수준이었다.

(17.5/7.7/3.5라는 성적의 전부문 하락세는 Boston을 떠나 팀에서 확실한 트렌지션 적응 실패와 맞물린 난사, 그로 인한 출장시간 제한이었다. 그는 아직 올스타이고 싶다.)

 

Peja Stojakovic - 8.4점, 3.0리바운드, 1.5어시스트로 비교적 초라했지만 그의 통산 성적은 18.2/5.0/1.9이고, 3점 성공률은 40.5%이다.

 

 

하지만 Allen Iverson이 ROY(Rookie Of the Year) 트로피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23.5점, 7.5어시스트, 4.1리바운드, 2.1스틸이라는 어마어마한 루키로서의 성적 덕분이었다.

 

 


 

 

 MJ와 A.I는 가장 훌륭한 루키로서의 결과물인 ROY 트로피를 쥘 수는 있었지만 향후 리그에서의 대접은 그들의 외형만큼이나 달라졌다.

그들의 이미지는 마치 MJ는 리그를 구원해낸 슈퍼맨, AI는 리그에서 가장 필요한 흥행요소이지만 사고뭉치인 Hancock과 같은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고 할까?

 

 

  MJ의 사회봉사 측면에서 타의 불허를 허락지 않을만큼의 공익 광고에서 각광받던 그의 실력과 최고의 이미지가 일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각종 자연 재난에 그는 언제나 큰 액수를 기부하고, 봉사에 솔선수범하자는 캠패인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는 각종 다른 스포츠의 최우수 선수들을 조연으로 둘 수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NBA의 위상은 더욱 더 높아졌다.)

 

 

 반면, AI는 입단전 구속된 경험이 있다.

그 이미지는 A.I의 이미지를 악동(bad boy)으로 굳히게 만드는 역할을 했는데 A.I는 스스로 약체팀이라 평가받았던 Philadelphia 76ers를 지구우승으로 이끌고, 서부에서도 기적같은 1승을 보여주며 그의 훌륭한 Professional mind와 열정을 팬들에게 보여주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고, 그는 리그의 몇 안되는 전국구 스타가 되었다.

 

 

 

MJ는 철저한 자기 관리로 얻은 이미지와 자기 절제로 이미지를 철저히 혼합시킨 선천적 완벽한 선수 이미지였다면

A.I는 할 것 다 하는 절제라고는 모르는 악동에서 그래도 열정이 훌륭한 선수로 바뀐 자수성가형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Spare Time : 쉬는 시간, A.I가 체포되었던 그날, The Dreadful Valentine's Day


 

 

 

 AI의 체포는 사회적으로 어마어마한 파장을 가져다 준 일이었다, 사건의 규모로나 인종차별적인 처우로 인한 불평등한 선고를 받았다는데 있어서(racial bias in the adjudication of the case) 당시 가장 유명한 시사 프로그램이었던 <60 Minutes>에 AI의 인터뷰까지 나오게 되었다.

 

 

  사건의 요지는 1993년 2월 14일, 그와 친구들은 Spare Times라는 볼링클럽에서 이야기도중 옆쪽 백인학생들의 흑인은 닥치라는 말에 격분하여 일어난 싸움이었는데 백인학생들의 주장에 의하면 싸움 도중 Iverson은 한 여학생의 머리를 의자로 내리찍었다고 한다.( Iverson allegedly struck a woman in the head with a chair.) - [중요한 사실은 이 증언은 백인학생들의 진술을 중점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싸움으로 AI를 포함한 그의 세친구가 체포되었으나 백인학생들중 체포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아이버슨과 같이 체포된 친구들은 전부 아프리카계 흑인이었다.

아이버슨은 "집단에 대한 폭력적 난동으로 인한 사회 분위기 와해"<maiming-by-mob>라는 통상적으로 어른들에게 적용되는 죄를 물어 구속되었다. 하지만 AI는 자신은 의자로 여학생을 때린 적이 없다고 증언했고, 이가 60minutes에 방영되자 Virginia 의원인 Douglas Wilder(미국의 첫 아프리칸 흑인 출신의 정치인)는 Iverson의 판결이 인종차별적이며 불평등하게 이뤄졌다며 무죄 선고를 주장했고, 이는 법원에서 아이버슨 무죄 선고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아이버슨은 수감소에서 "증언한 사람들이 차라리 내가 어떤 멍청한 놈의 머리를 의자로 때렸다고 했으면...하는 마음이다."라고 전하며 위증도 처벌받지 않는 백인학생들과 위증으로 사법처리된 자신의 상황을 꺼내놓아 논란이 되었다.

 

 

<60 Minutes : 미국의 CBS 채널에서 하는 시사고발 프로그램으로 1968년부터 사회의 각종 부조리한 사건에 대해 고발해온 프로그램으로 한국의 pd수첩과 같은 프로그램이라 볼 수 있다.>

 

 

 

 

 

 


리그에 적응하던 모습.... 그는 리그에서 가장 보기에 즐거운 선수였다.


 

여러분들의 Jerry Stackhouse에 대한 의견이 어떠신지 궁금하다.

그는 입단 첫해 Pilli의 외로운 싸움꾼이라 불리어도 될 선수였으며 Post Jordan의 한명이었다. 비록 Detroit로 트레이드 되어서는 Grant Hill에 득점을 양보해야 했기에 두 시즌간 15.7/14.5점밖에 될 수 없었지만 그는 00-01시즌 29.8점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훌륭한 득점원이었다. 그가 져니맨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팀을 돌면서 그는 공격의 1번 옵션이 되지 못 했다.

 

 

 필라델피아에서 그는 A.I에게 밀려 2번 옵션이 되었고, 다음 팀이었던 디트로이트에서는 Gentle Hill에 밀려서 2번 옵션이 되었고, 워싱턴에서 1번 옵션이 되려하니 마사장님 돌아오셨고, 달라스에 가니 이미 Dirk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훌륭한 탄력으로 덩크슛 콘테스트에도 참여할 정도였으나 그의 실력은 단 한번도 훌륭한 스윙맨을 누르는 1위는 되지 못 했다.

 

 

 

그러한 이유로 필라델피아에서 그는 A.I라는 후배에 밀릴 바에야 다른 팀에 가겠다며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이른바 리그 최고의 투가드는 제대로 작동도 되기 전에 SG 성향이 짙은 듀얼가드였던 Allen Iverson을 바탕으로 한 팀 성향에 밀려 버림받은 것이었다. 아이버슨의 공격에 대한 방식은 shoot first, pass next 식이었는데다 그는 crossover를 통한 페넌트레이션으로 2선을 무너뜨리고도 골밑에서 여유로이 득점을 할 수 있었기에 팀은 스스로 공격을 만들어 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Jerry Stackhouse를 수월하게 버릴 수 있었다.

 

 

훗날 인터뷰에서 Jerry Stackhouse는 "Allen 대신 Marcus Camby를 뽑았다면 나는 76ers를 챔피언을 만들었을 것이다."라는 발언으로 76ers 팬들에게 가장 환영받지 못 하는 스타가 되어 버렸다. 지금도 Stackhouse가 오는 First Union center에는 그를 향한 야유를 종종 볼 수 있다.

 

 

 

 

 신인시절의 Iverson은 파격적인 실력은 선보였으나 미디어를 다스리고, 이끄는 능력은 너무 없었고, 자신의 말과 같이 저명인사 위치로서의 압박에 시달렸다. 번번히 공에 대한 이기심, 실패감, 선배선수들에 대한 예의 결핍, 힙합과 갱스터 문화를 이끄는 범죄자 이미지 등으로 미디어의 공격 대상 1위에 오르자 그는 다음해인 Sophomore season에 좀 더 팀플레이어로 변하고자 야투를 줄이고 어시스트에 조금 더 치중하였는데 (96-97 season : 23.5 → 97-98 season : 22) 그의 패스에 대한 센스는 이때부터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그의 대인 수비 능력이 상당히 좋다는 사실도 이때 제대로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이듬 해인 1998-1999시즌, 아이버슨은 그의 첫 플레이오프를 경험하는데 당해 10경기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뒤로한채 출장한 그는 평균 44.4분 출장하여 Orlando Magic을 꺾고, Indiana Pacers를 상대하면서 인상 깊은 활약을 보여 준다. 그해 그는 평균 26.8점으로 그의 첫번째 득점왕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고, 다음해인 1999-2000시즌 28.4점을 기록하며 팀을 다시 플레이오프에 올려 놓는다. 그해 그는 플레이오프에서 26.2점, 4.8어시스트, 4.0리바운드, 1.3스틸을 기록했고, Baron Davis와의 샬럿과의 1라운드 경기에서 40점 이상의 활약을 펼치며 그해 MVP에서 Shaquille O'Neal을 제외한 최고 득표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해 여전히 76ers는 Pacers에 무너져야 했다.우승을 위해 싸우던 Reggie Miller는 Ron Artest, Jermain O'Neale, Jalen Rose등 훌륭한 선수를 많이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 포즈(관중들에게 함성을 들려달라고 요청하는 포즈)는 리그에서 A.I가 제일 잘 어울릴 것이다.

 

난 이렇게 관중들에게 함성을 요구하고, 그만큼의 경기를 펼치는 그와 같이 뛰어 보고 싶다.

 

나도 그처럼 관중의 함성 소리에 미쳐 경기를 하려고 한다. 그의 열정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 Kevin Garnett, 아이버슨에 대한 트레이드에 대한 인터뷰에서

 

 

케빈가넷은 유독 많은 슈퍼스타들에게 공격적인 선수였다. 지나친 승부욕때문에 왠만한 선수들은 모두 적이라고 생각할만큼 그는 미디어에서 타 선수들을 칭찬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는 유독 아이버슨에게 열려있었다. 아마도 출중한 능력에도 반지 하나 얻지 못하던 아이버슨의 처지에서 자신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Jerry Stackhouse가 트레이드 되고, Philadelphia에는 키스 밴혼, 데릭 콜먼, 에릭 스노우, 무톰보가 정착되는 시기가 오는데 데릭 콜먼, 키스 밴혼은 상위픽에 신인부터 인정받았던 리그의 선수들이었지만 진검 실력은 한없이 쳐져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 하며 적당히 76ers 멤버로 녹아들게 된다. 그리고, 팀은 드디어 고대했던 동부 컨퍼런스 우승을 하고, 서부와 챔피언을 다투게 되었는데 온갖 미디어들과 전문가들의 결과는 한단어였다.

 

 

 

 

Sweep : 4경기만에 완벽한 패배를 당하며 우승 트로피를 빼앗길 것이라고....

엉덩이 부상과 손가락, 햄스트링등 부상을 달고, Milwaukee, Toronto와 싸워온 A.I는 연속되는 7차전을 경험했고, L.A는 패배를 모르는 팀중 하나였다. 그들은 시즌 챔피언이었던 Sacramento Kings도 꺾는 팀이었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필라델피아의 완패였다.

 

 

 

하지만 Sweep은 아니었다. 그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챔피언 1차전 허슬로 스틸한 후 코비를 앞에 두고 레이업하던 아이버슨,

종료 직전, 자신의 마크맨이었던 Tyron Lue에게 crossover를 한후 결승 점프슛을 쏜후 넘어진 Lue를 넘고 간 아이버슨...

챔피언은 L.A였지만 MVP는 모두가 Allen Iverson이라고 하던 플레이오프였다. 그는 그해 최고의 영웅이었다.

 

 

비록 기적을, 그리고 기적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던 Lakers였으나 이변과 기적은 아이버슨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Allen iverson의 대한 개인적 견해와 Quiz~


 

 

 


 

A.I는 2008 시즌까지 27.9점으로 역대 리그 평균득점 3위에 올라 있었다.

1위는 30.12점의 Michael Jordan이었고, 2위는 30.07점의 Wilt Chamberlain이었고 말이다.  

그의 득점력을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는 끊임없이 Ball-hog냐는 논쟁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ball-hog라 해도 그만큼의 활약을 하지 못 한다면 제 아무리 Kobe라도, 아니 제 아무리 MJ라도 그만큼의 야투의 기회를 얻지 못 했을 것인데 유독 아이버슨의 경우는 잡음이 많았다. Kobe와 MJ처럼 A.I도 ball-hog라는 비판에 서기 보다는 Ace이자 Swingman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필자의 개인 의견이다.

 

 

이 사진을 보시라!!

 

 


 

 

자칭 Worrior라는 Ron Artest는 201cm/112.5kg로 A.I의 체격조건(183cm/81.4kg)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런 선수들과 싸워서 꾸준히 28점 정도의 성적을 낼 수 있는 선수가 얼마나 될까요? 지금 아테스트의 키는 리그 평균보다도 2cm가 작지만 아이버슨 옆에 서니 한마리의 괴수같으니 말이다!!

<아테스트를 정말 좋아하는데 참 A.I 옆에서 너무 괴수 쀨이네요~ >

 

 

Quiz - 2008 시즌 우승팀 Boston Celtics와의 경기에서 Allen Iverson은 두번의 40+ 경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렇다면 A.I가 제일 많은 40+ 경기를 만들어낸 상대팀은 어디이고, 몇회일까요? <드래그해주세요>

 

답 : Milwaukee Bucks, 8 times

 

 

 

 


문화 아이콘이 되어버린 농구선수를 예찬하다....


 

 

 
사람들 눈 거의 똑같겠죠? 아이버슨은 미국 내에서도 인정받는 패션 리더이자 문화리더니 말이에요~


아이버슨의 져지는 지난 10년동안 가장 꾸준하게 많이 판매된 4벌중 하나였답니다. (MJ - Kobe - Allen Iverson - KG 順)

출처 - alleniverson.com

 

 

 

A.I의 single라고 표시된 곡 The Finest (Ft. 50 cent)

http://www.youtube.com/watch?v=1nHh00xSUm0&feature=related

 진위를 알아보기 위해서 힙합마니아 미국인 친구들에게 물어 봤지만 정식 발매된 앨범은 없는 것 같다네요. 한동안 A.I freestyle이라고도 돌았던 곡이라고도 하고요.

 

 

또 다른 A.I의 single, Metho (ft. DMX)

http://www.youtube.com/watch?v=O-Sk53HpWpU&feature=related

 

 

 

Reebok의 역대 Iverson 작품들(몇개는 못 넣었습니다.)

(Question과 Answer series - Reebok 역사상 가장 오랜 스폰서 선수이죠, 아이버슨!!)

 

 

 

 

아이쿠 힘들다~

기다리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아이버슨의 글은 총 4편으로 오늘은 2편인 이 것까지 올립니다. 좋은 밤 되세요 :-D 

출처 : Welcome to Jamesized universe!!
글쓴이 : NewYorkerHAH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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