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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국과 흑인 사회를 변화시킨 NBA와 선수들의 움직임 - 이미지, 그리고 환상 (2)

나비넥타이 2012. 4. 18. 09:02

 1편 - http://cafe.daum.net/ilovenba/7n/212373

 

 

 

5. 흑인 이미지의 변화의 시기

흑인들은 소위 자신들만이 이야기하는 hood에서 자란 이들끼리의 끈끈한 정이 있다. hood란, 못 사는 동네, 즉, 슬럼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에게 hood 출신이 아닌 이가 갱스터 랩을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고, 흑인 가수의 부드러운 음악은 호불호가 존재했다. 자신의 삶은 형편없는데 사랑 노래를 불러주니 달갑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사랑 음악으로 흑인들뿐 아니라 전세계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던 Nat King Cole, Ray Charles, Marvin Gaye, Aretha Franklin, Steve Wonder와 같은 인물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여러 명반을 남기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뮤지션들,

Nat King Cole, Ray Charles, Aretha Franklin, Marvin Gaye, Steve Wonder 순

 

 

 

그러던 어느 날, 흑인 사회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82년,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수많은 기록을 세운 thriller 앨범을 낸 마이클 잭슨이 세계 팝시장을 들썩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의 영향력은 전 세계에 미치게 되었고, 흑인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능력과 힘을 전세계에 펼쳐준 이 인물에 대해 열광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흑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말 그대로 전 세계가 그에게 열광했다. 그것은 레이 찰스의 신나는 블루스도, 마빈 게이의 끈적거리는 소울 뮤직도, 그리고, 스티비 원더의 활기찬 음악도 아니었다. 그저 흥이 돋는 비트에 절대 흉내낼 수 없을 것 같은 화려한 퍼포먼스로 세계를 사로잡은 마이클 잭슨은 흑인들로 하여금 세계에 자신들의 입지와 능력을 표현해주길 바랬다.

  

앨범 전체를 히트시킨 장본인

시대의 performance를 남긴 장본인

세계 음악 역사상 Beatles와 모든 기록을 다투는 이

그는 작년 6월 보여 줄 많은 것들을 다 풀어 놓지도 못 한채 세상을 떠났다.

Rest In Peace

 

 

 (하지만, 마이클 잭슨의 평온한 성격과 유순한 성격은 여느 연예계에서나 겪어야 할 미디어의 힐난을 감내할만한 것이 아니었고, 그는 미디어에 피하기 급급했다. 잭슨이 자신들의 바람과는 달리 자신들을 위한 어떠한 것도 대변해주지 못 하자 많은 흑인들은 잭슨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입지가 곧 생존권이었기에 그들은 영향력 있는 흑인들이 자신들을 대변해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자신들이 바라는 소스의 어떠한 것도 제공해주지 않던 잭슨을 미디어 또한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업적과 능력에 비해 그는 언론으로부터 너무나도 형편없는 조롱의 대상으로 남았다. 미디어는 그를 * Jacko라 부르며 점점 위대한 뮤지션이라기보단 괴짜 연예인으로 그렸다. 아마도 너무나 큰 인기의 댓가가 이런 조소와 비난이었다면 Jackson의 인기는 너무나 큰 댓가를 요구한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 해주던 갱스터 래퍼들의 인기가 높았다.)

 

 * 미국식 영어는 특정 명사의 어미에 -o를 연결하게 되면 조소의 의미를 담겨 있는 "멍청이" 혹은 "패배자"와 같은 의미로 변환된다. 그리하여 미국의 의료보험제도를 비판하던 Michael Moore 감독의 영화 Sicko"병들어 버린 패배자" 정도의 어감을 가지고 있는데 의료보험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해 안타깝게도 불구가 되는 많은 미국 국민들에게는 아픈 것이 곧 패배자로 가는 길이라는 심오한 의미를 담은 한 단어를 주제로 정하기 위해 sick이라는 단어에 -o를 집어 넣은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조소의 단어는 세계 각국에서 매해 만들어 지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고소영(고대 출신, 소망 교회, 영남권 출신 인사)정권이라는 말의 발생과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렇게까지 비판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었던 Michael Jackson의 삶은 미디어에 의해 너무 많이 무너졌다.

 

 

 

 

농구는 4대 메이져 스포츠중 미식 축구와 더불어 흑인 선수가 가장 많은 스포츠이다.

60년대의 괴물 스타 러셀, 체임벌린을 계보로 꾸준히 훌륭한 선수들이 나왔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여전히 밥 쿠지, 제리 웨스트, 빌 월튼을 이야기했으며 종종 체임버린의 위대한 기록을 부정했다. (미국 언론은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사회 분위기였고, 미국의 부끄러운 과오이기도 했다.) 리그는 80년대가 되어서야 래리 버드라는 리그를 주름잡는 선수에 대적하는 매직존슨이라는 희대의 라이벌을 홍보하며 알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흑인 슈퍼스타들이 등장하고, 리그는 본격적인 흑인 슈퍼스타들의 것이 되기 시작했다. 많은 백인 팬들은 흑인 선수만 뛰는 리그를 우려했다. 그들은 Julius Erving에 열광하고, 환호했지만 그들은 또한 끊임없이 걱정했다. pure shooter가 아닌 백인 슈퍼스타를 기다리던 어느 날, 마이클 조던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분명 리그의 그 어느 선수와도 다른 이미지를 나타냈다. 전설적인 감독, 레드 아워벡(Arnold Jacob Auerbach)은 인터뷰에서 ‘이전의 라이벌 구도는 리그 내의 슈퍼스타 간의 치열한 전쟁을 통해서 이뤄졌지만 조던이 등장하면서 그가 너무나도 뛰어나 어느새 라이벌 구도는 조던 대 리그가 되어 버렸다.’고 전하였다.

 

 

 다시는 나오지 못할 법한 11개 반지의 주인공, Bill Russel과 그를 조련했던 Arnold Jacob "Red" Auerbach감독.

 빌러셀에게 '리바운드 한 개를 한 골처럼 생각하라'는 이야기를 했던 감독으로 당시 셀틱스의 완벽한 속공 플레이를 연출함으로써 거듭되는 우승을 쥐어 주었다.

 

 

이외에도 척 데일리, 조지 칼, 팻 라일리 감독 등, 리그내 최고의 명장들 또한 조던에 대한 경외심을 미디어에 이야기했으니, 여느 루키도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찬사를 조던은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여느 팀스포츠와 마찬가지로 한 선수의 기량이 절대적이어서 딱히 지목할만한 라이벌을 구축할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가 매 순간 확인되는 역사에 등장한 마이클 조던은 미디어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시절의 최고 실력을 선보였던 Wilt Chamberlain과 같은 전설의 정확히 확인할 길이 거의 없던 도미넌트함과 달리 순간, 순간 눈으로 확인 가능해졌기에 더욱 더 놀랍고, 새로울 수 밖에 없었다.

 

Super Star's Ridiculous Debut

아직 스포츠 브랜드 시장에서 그 영향력이 확실하지 않았던

Nike는 Air Jordan을 바탕으로 시장에 승부수를 띄었다.

리그의 벌금 재제를 정면으로 뚫고 홍보를 해야겠다던 Just Do It 정신

결국에 Nike社를 세계 1위의 스포츠 브랜드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제 아무리 Nike의 탁월한 마케팅 능력과 기술의 변혁이 있었더라 해도

그 홍보에 절대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Jordan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80년대,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었던 Julius Erving, Magic Johnson, 그리고, Larry Bird까지

리그가 인정하고, 가장 밀어 주던 세 명의  선수를 활용했던 Converse의 열기가 Nike에

그리 쉬이 밀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시기였다.

마치 현재의 코비와 르브론의 Nike 판매량을 Jennings의 Under armour가 능가하게 되는 셈이라고나 할까?

물론, 코비와 르브론의 입지에 비해 아직 한없이 작은 제닝스이지만

당시 조던의 입지 또한 어빙, 버드, 매직의 입지와 논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는 1순위 올라주원과 2순위 샘 보위보다도 더 뛰어날지 아직 보장도 되지 않은 선수였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드래프트 당시 포틀랜드는 그를 가르켜 "덩크만 잘 하는 반쪽 선수"라 부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고등학생 Jordan은 맥도널드 올어메리칸에도 선출된 뛰어난 선수였지만

그는 여전히 최고 선수의 대접도, 인정도 받지 못 했다.

오죽했으면 그의 수학 교사였던 제니스 하디는 조던에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수학을 전공하라'는 충고를 했을까..

 

 

 

80년대 중, 후반 미국은 본격적인 세계화를 진행하였고, 언론은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잘 파악했던 David Stern 총재는 곧 리그 또한 세계화에 발맞춰 새로운 도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젠다를 구축한다.) 미국은 전세계에 가장 미국다운 것을 어필하기 위해 스포츠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고, 전세계는 미국의 최고 스포츠인 미식축구도 야구도 아닌 농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미국 4대 스포츠 중 가장 인기나 규모가 작았던 NBA가 세계에 가장 어필했다는 점인데 이것은 스턴 총재의 끊임없는 1) 세계화 - 국제 선수 발굴 지원 - 추진과 2) 조던의 등장이 가장 큰 공을 했다는 평가가 많다.) 그리고, 리그를 달구던 마이클 조던은 점점 더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사회와 전 세계는 그의 플레이만큼이나 그의 신발에게 열광하기 시작했다. 곧, 마이클 조던은 세대, 인종, 나이, 스포츠의 모든 경계를 초월하는 인물이 되었다. (David Falk, Michael Jordan's attorney- 조던의 법적 대리인, 데이빗 폴크, NBA 선수들과 전문적인 계약을 맺어 주는 스포츠 에이전트로서 마이클 조던의 나이키 계약과 동시에 ‘에어 조던‘의 이름을 직접 만든 주인공, 스포츠 산업에서 이런 장구들이 비즈니스의 한 축이 될 것이라 예측했던 이이기도 하다.)

 

 

92' Barcelona Olympic 당시 바로셀로나의 전경

Nike의 Jordan 활용도는 가히 스포츠 용품

비지니스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다.

허라취와 맥스류의 신발이 산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Nike에 Reebok, Adidas, Converse 등은 속수무책으로 밀려 난다.

 

 

 

 

 흑인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입지를 높혀 줄 진정한 인물이 나왔다고 열광한다. (다소 우스운 이야기지만 당시 흑인들은 휘트니 휴스턴과 같이 타고난 가수들은 백인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예쁜 광대라고 생각한 반면 조던은 백인들은 도무지 흉내 낼 수도 없는 새로운 것을 해내는 예술가라는 생각을 가졌다. 광고에선 곧 Michael Jordan의 노래를 만들었고, 타 장르(뮤지컬 Full Monty)에서는 마이클 조던을 내용으로 한 노래를 만들기까지 했다.) 그의 반듯한 이미지는 영향력 있는 흑인들도 격식 있음을 어필하게 되었고, 흑인들의 마케팅적 가치나 사회적 영향력은 이제껏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클 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백인 중심의 언론이 한 흑인 농구선수를 포커스하고 찬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위대한 종교지도자를 한낱 사회주의자에 불과하다 만들었던 언론의 모습과 사뭇 대조적이었다. (*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베트남 전쟁을 두고 ‘미국사회가 베트남의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전쟁터에 보내진 흑인 병사들 또한 민주주의를 누려본 적이 없는 미국 청년들’이라며 정치계와 언론계에 당혹감을 주었고, 그러한 이유로 민주사회주의를 주장하던 마틴 목사를 두고 일부 언론은 생각 없는 사회주의자라 묘사하기도 했다.)

 

  미국의 중심에 서있던 많은 산업이 이 흑인선수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이 흑인 청년의 마케팅적 가치는 전세계에 통용될 수 있음을 인지한 많은 산업이 그에게 구애하기 시작했다. 조던은 정치적 성향을 전혀 띄지 않고도 수백년 간 지속되어 온 미국사회와 흑인들의 어색한 관계, 그리고 미국의 과오를 옅게 만들었다. 여전히 미국 사회는 백인, 유대인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흑인의 입지가 조금씩 확대되기 시작한다.

 

(* 이런 조던의 모습을 통해서 Nike는 자신들과 계약하는 선수들에 대해 교육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정치색을 띄지 않는 선에서 사회적 책무를 다 하라는 점이다. 이 규율을 무척 잘 따르던 Kobe Bryant는 2008년, Nike Hyperdunk의 공식 모델로서 자리한 쇼케이스에서 뜬금없이 '티벳 유혈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묻던' 기자의 질문에 '중국 올림픽에 참가하여 플레이 함으로써 그곳의 사정을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라'는 현답으로 조리있게 잘 피해나갔다. - 이는 IOC가 중국 인권 문제에 관한 어떠한 입장 표명도 하지 말라는 내부 지침도 있었지만 나이키의 조던식 성공 방법을 잘 벤치마킹한 코비의 순발력도 한몫했다. 혹여 티벳 발언으로 인해 중국 시장에 큰 타격을 입을까 우려했던 Nike로서는 다시 한번 Kobe를 대표 모델로 쓴 것에 대해 뿌듯해 했을 것이다.)

 

입을 순순히 닫고 있다면 유희열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유명해진 많은 흑인 celebrity들은 급작스레 돈을 많이 벌어 흥청망청 쓰기 일쑤이며 심지어는 약에 손을 대거나 여러 가지 구설수로 자신들의 위신을 세우지도 못 했기 때문에 흑인의 사회적 입지를 높힐 수 있는 수준이 되지 못 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스스로의 이미지를 한없이 망가뜨린 Mike Tyson, Bobby Brown과의 결혼으로 망가져버린 Whitney Houston, 미디어와 잘 대처하지 못 했던 참 착했던 Michael Jackson이 있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미디어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지 못 했고, 이전의 인물들에게는 미디어의 노출 빈도에서부터 한계가 발생했다. 하지만 Michael Jordan은 미디어에 끊임없이 노출될 수 있는 모든 요건을 갖추었다. 그것은 조던이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조던은 그가 원하던 것 이상으로 미디어에 노출되었고, 팬들의 환호성은 점점 높아져 갔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단어는 무의미하지만 - 아주 만약 줄리어스 어빙이 ABA가 아닌 NBA에서 곧장 데뷔를 했더라면, 그리고, 그가 플레이했던 시대에 ESPN이라는 스포츠 최고의 방송사가 존재했더라면 아마도 조던은 줄리어스 어빙의 영향력을 뛰어 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줄리어스 어빙, 그리고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같은 조던의 바로 윗 선배들은 교양 있는 언행으로 흑인들의 사회적 입지와 이미지의 변모에 한몫했으며 코트에서는 그와 비슷한 고공플레이로 뜨거운 인기를 얻었으니 아마도 조던과 비슷한 플레이를 펼치며 자신의 사회적 입지에 걸맞는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는 선수였다면 팬들에게는 가장 어필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탁월한 능력과 노력뿐만 아니라 시대마저 타고난 조던은 NBA와 더불어 세계 스포츠使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한명이자 흑인의 입지에까지 직,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 되었다.)

 

중후한 멋이 나는 리그가 낳은 두 명의 날라 다니던 선수들. 그들에게도 나름 "air"에 대적할 별명이 있다.

Dr. J (J박사님, J는 Julius Erving의 이니셜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그의 장기인 Jump라는 이야기도 있다.)

Clyde "The glide" Drexler (활강하는 드렉슬러, 그는 만능 스포츠맨으로 골프보다 테니스를 좋아 한단다.)

 

 

* Julius Erving의 평가를 하나 인용해 보자면 그가 얼마나 정말 흑인 사회에 귀감이 되는 인물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농구 선수로서 어빙은 처음으로 NBA의 대변인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는 그의 역할이 무엇이며

그 역할이 그로 하여금 리그의 대표자로서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줄리어스는 내 생애 유일하게 스포츠를 초월해 "박사"라는 이름 그대로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였습니다."

– 코치, Billy Cunningham.

 

 

 

 

 

 

 

 

 

 

6. 선수 이미지 변화, 리그 발전과 사회 기여의 역사

이미지 변화로 어느 집단의 사회적 입지, 위상 그리고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변모하게 되면 그 집단은 여타 집단으로부터 공명정대한 처우를 요구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암묵적 이득을 누릴 수도 있다. 미합중국이 들어선 이후 아프리카로부터 끌려와 노예로서 한탄의 삶을 살았던 미국 내 흑인들에게 이런 정당한 대우의 목소리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대다수가 African-America으로 이 들은 미국 인구의 약 12.8%에 육박한다.)

 

 이런 사회적 입지를 표명해줄 수 있는 이들로 흑인 celebrity는 그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데 NBA는 각각의 선수가 자선사업 혹은 기부사업을 하는 등의 사회 활동을 장려함으로써 그들이 흑인 이미지 개선과 리그의 수익 증대를 도모했지만 90년대 중, 후반에 들어서며 리그 중심의 공익 사업이 커지기 시작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NBA cares는 이제껏 누적 기부금 1억 5000만 달러(한화 추산 약 1760억원)를 사회에 환원하며 선수들의 적극적 동참을 유도했다. 그 시작은 2000년대 축산업이 위축되며 산업 자체가 줄어 들자 Got Milk? 캠패인에 동참하여 낙농업 농가의 재건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순간이었다. 이 캠페인은 주로 NBA 경기 중간에 선수들이 우유를 마시며 우유의 장점을 이야기하는 광고와 지면 광고를 통해 진행되었다.

 

Got milk? Kids like milk.

Not Got Drunk! Ri'Dirk"ulous!

 

 

 

이렇게 공인의 입장으로서 NBA 선수들은 흑인들의 사회적 입지를 대변하기 위해, 그리고 공인으로서 미국 사회를 위한 꾸준한 사회적 책무를 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바로 2005년도에 뉴올리언스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복구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선수들의 활동이다. 우리의 기억에는 Tracy McGrady와 Gilbert Arenas의 장거리 삼점슛 쇼다운 동영상으로 기억되는 이재민 돕기 자선 경기에는 케빈 가넷, 코비 브라이언트, 드웨인 웨이드, 르브론 제임스 등이 참여했는데 이 올스타전을 방불케 하는 경기는 TNT의 명실상부한 최고의 코미디 진행자인 케니 스미스의 적극적인 주도로 성사될 수 있었다. 당시 스미스는 선수들에게 선수 개인이 누리고 있는 엄청난 특혜는 곧 수해민인 팬들과 커뮤니티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며 현역 선수들을 독려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참가했던 선수들은 개개인이 성금으로 적게는 40만달러(약 4억7천), 많게는 120만달러까지(약 14억1천)의 거금을 성금으로 냈다.

 

가운데 있는 진행자, Kenny Smith

리그에서 특출난 활약을 보여준 적은 별로 없지만 1995년 NBA final에서 로켓츠 스쿼드로서

연장으로 이끄는 3점슛 포함, 7개의 3점을 성공하였다. 경기는 로켓츠의 120-118 승리

로켓츠의 일원으로서 그는 두 개의 반지를 획득하였다.

TNT 진행자로서의 그는 Kobe의 Hyperdunk 광고를

코믹하게 패러디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영상 : http://www.youtube.com/watch?v=SD30MnFlsPg

 

 

 

현재 거대 공사 장비를 보유한 회사를 운영하는 Karl Marlone은 자신의 회사 장비를 가져가 청소하는데 적극적인 지원을 했고, 마이클 조던은 비공식적으로 300만달러(42억)정도를 기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 현역 선수들이 각개 어마어마한 기부를 했고, 직접 복구현장에서 일하며 땀을 흘린 이들 또한 무척 많았다.(데이빗 로빈슨, 앨런 휴스턴)

 이후 아이티 지진(코비 브라이언트, 사무엘 달렘베어 주축)과 여러 천재지변에 기부를 하며 자신들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선수들이 늘었고, 리그 당국은 이런 활동을 더욱 더 독려하고 있다. 개개인의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활동은 각개 다양한다. 신장병으로 고생했던 션 엘리엇과 전사, 알론조 모닝(Zo's Summer groove를 매해 진행, http://thesummergroove.com)은 신장병 환우 재단에 꾸준한 기부를 하고 있다. 로니 튜리아프 또한 지병인 심장병으로 고생했던 경험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심장병 재단(http://ronnyturiaffoundation.org/)을 건설해서 운영중이다. 알론조 모닝의 행사는 그를 아끼는 선배인 무톰보와 그가 좋아하는 후배인 드웨인 웨이드의 적극적인 지지와 원조가 함께 한다. 튜리아프의 경우, 전 레이커스 동료들과 여러 친구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다니 무척 든든한 일이 아닐까 싶다.

 

투병 이후 다행스럽게도 우승 트로피를 손에 쥐었던 엘리엇과 모닝

안타깝게도 로니 튜리아프는 Lakers가 우승하던 08-09 시즌부터

워리어스에서 플레이하며 트로피를 안아 보지는 못 했다.

하지만 그의 기부 정신만큼은 충분히 트로피 감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자신의 사회적 입지를 통해서 사회에 헌신하는 선수로 우리에게 무척 낯익은 인물들에는 유독 장신의 센터들이 많은데 이중 가장 두드러지는 이들이 바로 무톰보와 데이빗 로빈슨이다. 태생이 콩고 민주 공화국인 무톰보는 자국의 열악한 의료 환경으로 매해 수십만명의 아동들이 말라리아 및 각종 치유 가능한 질병으로 산화되는 것이 안타까워 대형 병원 건립을 추진하고 진행해오고 있다. 그는 동문이던 패트릭 유잉과 알론조 모닝, 이외의 여런 전, 현역 선수들의 기부 동참을 유도하여 200억원에 가까운 돈을 기부했다. 병원 건립비의 60%를 조달한 것이다. 데이빗 로빈슨 또한 옛 동료인 션 엘리엇의 투병을 안타까워 하며 신장계 질병 및 소화내과 연구소에 막대한 기부금을 냈다. 또한, 그는 단일 기부금으로는 가장 큰 금액(500만달러, 한화 추산 60억원)을 기부하여 샌안토니오 지역의 청소년 수련 센터 건립을 주도했다.

 

 

 

NBA 기부 활동에서 가장 활발한 인물들,

팀을 위해 블록, 리바운드, 득점까지 해냈던 그들은

현재 사회를 위해 기부, 봉사, 위촉활동까지 활발히 하고 있다.

그들은 NBA를 은퇴하고 나서 받은 상이 무척 많다.

 

 

 

지역 사회 활성을 위한 일에 적극적인 선수들은 무척 많지만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하는 이는 콜로라도 출신의 가드인 천시 빌럽스가 있다. 그는 태어나고 대학까지 다닌 그의 연고지역인 덴버를 위해 매해 꾸준한 기부로 불후 청소년의 재활을 돕는 프로그램을 참여하고 있고, 올바른 언행으로 지역 사회의 선망의 대상으로 선 공로를 인정받아 NBA 모범시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상은 다양한 선수들이 수상했고, 현역으로는 빌럽스와 스티브 내쉬가 있다. 이런 다양한 활동을 상으로 측정하여 그 순도를 나타낼 수는 없지만 이 상을 받은 이들은 자신들의 위치에서 그 누구보다도 사회적 공헌에 앞장 선 선수들이라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1980년대에 거친 수비로 비판 여론이 많았던 디트로이트의 bad boys 멤버였던 다섯 멤버 모두가 모범시민상을 수상했다는 사실... 이런 사실을 반추하여 보자면 거친 선수가 꼭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

 

 

 

 작년 미국 셀레브리티 기부 순위 8위로 NBA 선수 중 유일하게 10위 안에 랭크된 덴버 너겟츠의 카멜로 앤써니는 대략 48억원의 기부를 하며 적극적인 기부와 봉사 활동을 참여하며 그의 부정적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었다. 앤써니는 언론을 통해 보여진 많은 부정적인 이미지와 달리 사회 봉사에 무척 적극적인 선수로 가장 드러나지 않게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선수로 알려져 있다. 매해 친구들을 초청해 자선 볼링 대회를 열어 기부를 앞장 서는 크리스 폴과 부상으로 많은 능력을 잃었지만 매해 자선 소프트볼 대회를 열어 기부금을 키우는 맥그레이디 또한 봉사에 앞장 서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모두가 의외라 생각하는 일을 제법 열심히 하는 Carmelo Anthony

밤마다 총격전이 일어나는 Baltimore의 한 슬럼가에서 자라난 그에게

빈곤은 잊고 싶은 과거이자 사회에서 제거해야 할 요소이다.

그는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날로 성숙해지고 있다.

 

 

 

 

비단 봉사뿐 아니라 바른 품행으로 흑인들의 입지를 적극적으로 높이는 인물에는 누가 있을까?

그것은 바로 Ray AllenBrandon Roy이다. 이들은 일전에는 쉬이 볼 수 없었던 정갈한 언어 사용과 공식 석상에 걸맞는 태도로 사랑받는 이들이며 동시에 자신들이 누리는 것들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환원을 모색하는 등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 왔다. 최근, 이들의 바른 품행과 선행을 닮은 대형 선수가 나왔는데 그가 바로 Kevin Durant이다. 그가 나이키와 계약을 할때 어릴때 비싼 신발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아 의기소침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판 삼어 자신의 시그네쳐 신발은 반드시 100달러 이하여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 정도였으니 그는 등장부터 바른 모양새를 보인 선수라는 인식이 커진다. 다소 철이 없던 그의 절친, 마이클 비즐리마저 그와 닮고 싶다 했으니 듀란트도 인물은 인물이다.

 

분위기 나는 두 선수, 이들을 스턴 총재가 아끼는 이유는 아마도

바른 품행 이외에도 단촐한 옷차림도 한몫하지는 않을까?

 

 

 

 

 이런 기부 및 사회 환원 활동으로 흑인들의 입지 강화와 사회에 긍정적 변화를 주는 슈퍼스타 중에서 나름의 봉사로 애써 노력했지만 억울하리만큼 티가 나지 않은 선수는 누가 있을까? 그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아이러니하게 마이클 조던이다. 그는 시카고 불스 소속으로 플레이를 하며 꾸준히 소년, 소녀 가정의 청소년들에게 티켓 일부를 지원해주었고, 장애우들을 위해 프리미어석까지 제공해주었다. 게다가 그는 2차 복귀 시절, 911 테러로 희생당한 소방관 자녀를 위해 옆자리 경매를 통해 마련한 24억(스파이크 리 감독에게 낙찰됨)을 기부했으며, 워싱턴 시절 받았던 연봉(26억) 또한 전액 기부했다. 그리하여 그가 꾸준히 기부한 것으로 전해진 금액은 대략 130억원,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지만 이런 기부 금액을 발표했던 포브스는 당해 스포츠 스타의 보유 재산 순위에 미하엘 슈마허와 조던을 8,800억원 소유로 소개하며 공동 1위에 랭크시켰다. (* 130억이 보유 재산의 1.47%의 위엄 -_-;;)

  비교적 꾸준한 사회 환원 활동을 했으나 그 의미가 반감된 대표적인 인물에는 르브론 제임스가 소개 되었는데 그가 돈에는 지나치게 인색하리만큼 기부에 소극적이며, 불필요한 언행으로 여러 차례 자신의 입지를 무너뜨렸다는 것.... 슈퍼스타로 살기는 어찌 되건 피곤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7. 결론

미국 내 흑인들은 NBA 선수들을 포함한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 이들이 단지 M-tv crib에 나와 얼마나 좋은 집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훌륭한 차들을 몇 대나 가지고 있는지를 자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아직 사회보장 제도의 득을 누리거나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 하여 만년 빈곤에 허덕이는 자신들의 권리에 명분이 생기도록 사회에 이바지하고, 그들이 누리는 많은 것에 걸맞는 처신을 함으로써 흑인들의 사회적 지위 그리고 입지를 올려 달라는 것이다. 물론, 어린 선수들에게 너무 과한 요구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과한 대접을 받으며 미국 사회의 경제부분과 미디어 영향력의 최상류층에 속해 있다. 누릴 수 있는 만큼의 다양한 역할을 기대하는 대중의 바람이 마냥 과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선배들의 도움으로 이뤄졌던 변화의 기류에 그들이 꾸준히 동참할 수 있다면 아마도 African-American 흑인들의 입지는 분명 더 올라갈 것이다. Ray Allen의 말처럼 말이다. 흑인들의 사회 활동과 입지는 이들의 활동과 맞물려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다. 이렇게 리그 주도하에 이뤄지는 다양한 사회 환원 정책과 선수 개인의 사회적 책무를 다 하는 모습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깊이 NBA라는 리그를 사랑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선수들의 사회적 책무가 우리나라 리그에서도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시그네쳐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언급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이야기도 조금 언급해보고자 한다.

여담이지만 아디다스 소속의 선수들은 슈퍼스타로서의 이미지로 조명 받으며 등장하기 보다는 좀 더 영글어지면서 계약을 한 경우가 많아서 대체적으로 점잖거나 성숙한 경우가 많지만 나이키는 이미 성공할 잠재력이 깊은 선수들을 시그네쳐 선수로 사용하기 때문에 종종 시그네쳐 선수들이 언행으로 곤욕스럽게 만드는데 제법 익숙해졌고, 그렇기에 재발 방지를 위해 더욱 더 오레곤에서 다각도의 교육을 시킨다. 이로 인해 선수 개인이 부정적 이미지를 말끔히 씻어 낸 경우도 발생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Carmelo Anthony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온 선수들의 상당수가 무례하기 그지없는데 반해 나이키가 선택한 07 클래스의 Kevin Durant는 탁월한 인성으로 Nike社와 필립 나이트 회장을 기쁘게 했다는 일화는 꽤나 유명하다. 리복과 컨버스와 같이 1인 슈퍼스타에 의존해야 하는 메이져 브랜드와 제닝스를 받아 들인 Underarmour와 같은 마이너 브랜드는 안타깝지만 아직 체계화된 시스템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08 class의 1,2위였던 Derrik Rose와 Michael Beasley는 nike가 버린 카드였는데 나이키가 주목하던 당시 포텐셜이 넘치는 선수는 OJ Mayo였다. Rose는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겸손함을 갖춘 어린 선수로 주목 받은 반면 Mayo와 같은 경우는 언행으로 인해 호불호가 나뉘던 선수, 하지만 Nike는 좀 더 오래간 매체의 관심을 받던 Mayo를 선택했고, 덕분에 08년 1,2위 드래프티는 아디다스의 시그네쳐를 신게 되었다. 올해 가장 가치있는 선수로 주목 받았던 John Wall과 같은 경우에 Nike 또한 주목하였지만 이미 Nike는 주축 시그네쳐 pg로 Nash, Mayo, Rondo등이 있고, 지원해주는 선수 중에는 Tyreke Evans등으로 포화상태이기에 포기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96년 드래프트에서 자신들이 주목하던 드래프티였던 Ray Allen으로 시그네쳐 선수 영입을 성공으로 점쳤던 Nike가 버린 카드였던 포인트 가드, Allen Iverson은 Reebok이 낳은 최고의 시그네쳐 선수가 되었다는 것,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John Wall에게도 큰 기대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출처 : Welcome to Jamesized universe!!
글쓴이 : NewYorkerHAH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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