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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번역글] 윌트 체임벌린: 인간과 초인 사이

나비넥타이 2016. 3. 20. 21:11



윌트 체임벌린에 대한 재밌는 글을 일고 번역 한번 해보았습니다


미국의 작가 겸 저널리스트 Gary M. Pomerantz이 2005년에 허쉬에서 한 연설을 기반으로 한 글입니다. 이 글은 지난 2012년에 윌트 체임벌린의 100득점 경기 50주년으로 나왔고요. 포머랜츠 씨는 현재 스탠포드 대학 커뮤니케이션 학과의 방문교수로 있습니다.

* 다들 아시겠지만 펜실배니아 허쉬는 그 유명한 100점 경기가 나온 곳이죠.
* 포머랜츠 씨는 2005년에 100점 경기에 대한 책 "Wilt, 1962: The Night of 100 Points and the Dawn of a New Era"를 써서 냈고, 이는 뉴욕 타임즈로부터 "Editors' Choice book"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 포머랜츠 씨는 1960년생으로 윌트와 동시대 인물이 아닌 만큼 팩트 관련해 좀 한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제가 번역 전문가가 아니고 읽으면서 빠르게 번역한 것이라 오타나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Wilt Chamberlain: Human And Superhuman
윌트 체임벌린. 인간과 초인



-- 1962년대 초반에 윌트 체임벌린은 본인의 말에 따르면 마운틴 라이온(=퓨마)의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절친인 칼 램지에게 말한바에 의하면 그는 시골에 혼자 있었는데, 퓨마가 바위를 짚고 그를 덮쳤다고 한다.
"내가 녀석을 맨손으로 죽였지"라고 윌트는 말했다.

램지는 의문을 표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윌트는 셔츠를 벗어서 길다란 상처들이 어께에 난 것을 보여주었는데, 램지는 이것들이 발톱 자국으로 보인다고 인정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일까? 윌트와 관련되어서라면, 누가 알겠는가?


-- 한번은 윌트가 호텔 로비에서 그를 둘러싼 필라델피아 워리어즈 동료들에게 또다른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의 첫 프로팀인 할렘 글로브트로터스가 1960년에 러시아를 방문했을때 일이었다.

당시 공산당 중앙정치국은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으며,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의 건배 제의하에 모두 보드카를 마시기 시작했다.

흐루쇼프는 "(다 취해서)한 사람만 똑바로 서있을 때까지 누구도 못 갑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하나하나씩 선수들은 쓰러지기 시작했다. 정치국의 일원들도 항복했으나, 건배는 계속되었다.

체임벌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으나 크렘린(러시아 수도)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술자리가 다음 날로 이어졌을때 단 두 사람만이 똑바로 서 있었다고 한다. 윌트와 니키타 흐루쇼프였다.

윌트 관련된 모든 이야기에서는 그가 초인이었으며,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그가 퓨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냉전을 승리한 것이다.


-- 윌트는 골리앗 컴플렉스의 희생자였으며, 동시에 이를 즐겼다. 그는 7피트 1인치, 260파운드의 거인이었으며 그가 그 이상의 존재였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그는 1999년에 63세의 나이로 벨에어 저택에서 사망했는데, 그의 삶은 두 개의 숫자로 요약될 수 있었다. 하나는 진실이고, 하나는 그의 신화를 제조하는 상상력의 결과물이었다: 100과 2만.

첫 숫자는 농구에서 나온 숫자이다. 50년 전인 1962년 3월 2일에 있었던 놀라운 밤을 나타낸다. 당시 펜실베니아 허쉬에서 필라델피아 워리어즈가 뉴욕 닉스를 169대 147로 꺾는 동안 그는 100득점을 기록했다. 그의 활약은 스포츠 기록사에서 "에베레스트"로 남아있으며, NBA 역사상 유일한 세자리수 기록이다.

또 다른 숫자는 그의 성적 능력을 보여준다. (역주: 100득점 당시) 놀라운 신체능력을 지니고 그 이상의 신화를 쌓아올리고자 했던 25세 청년으로서 체임벌린은 하루에 100점을 넣고 1961-62시즌 내내 평균 50점을 기록했다. 이러한 그의 갈망은 30년 뒤에 책에서 자신이 2만명의 여자와 잤다고 떠벌리게 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린다 휴이조차 이를 믿지 않았다. 그는 기존 주장에서 살짝 물러나 휴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친구 사이에 0 하나쯤은 뭐 어때?"(역주: 2만이 아니라 2천이라는 소리)

휴이는 나(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냥 사람들이 그렇게까지(2만명 동침) 말도 안되는 걸 믿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들은 믿었죠".

"2천명이라면 믿어요. 말이 되거든요"라고 휴이는 덧붙혔다.


-- 그와 같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Wilt the Stilt"(역주: stilt는 긴 작대기를 의미합니다)란 별명을 싫어했는데, 이는 물웅덩이 위에 있는 커다란 두루미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윌트는 "Big Dipper"(역주: 북두칠성을 의미)를 좋아했는데 이는 더 밝게 빛났으며 딴 세상같았다.

만약 운동능력을 사이즈, 스피드, 힘과 우연성의 조합으로 설명한다면 젊은 Dipper -- 10종경기 선수였으며 풀스피드로 달릴 때 한발 걸을 때마다 거의 8피트(2.4미터) 정도를 커버했던 그는 -- 순수한 운동능력으로서 짐 소프(역주: 20세기 초에 프로풋볼, 야구, 육상 등으로 활약했던 다재다능으로 유명한 전설적인 운동선수), 무하마드 알리, 짐 브라운 등과 더불어 20세기 최고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허쉬에서 100득점 경기는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내 책 "WILT, 1962"에 대한 조사를 하던 중, 이 경기에 대해 진짜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경기에 대한 신비로움은 그 고립성에서 기반한다. 관전한 이들은 거의 없었으며 TV 중계도 되지 않았다. 당시 꼴찌였으며 정규시즌을 5경기 남겨두었던 닉스를 취재한 뉴욕 기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허쉬 스포츠 아레나에는 당시 4,124명의 유료관중만이 있었으며, 이조차도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 워리어즈의 매력적인 구단주인 에디 고틀렙은 종종 관중수를 꾸며내곤 했다. 비록 4,124명이 공식적인 집계수였으나, 경기장에 몰려 숨어든 소년들 몇명은 이에 포함되지 않았다.

경기장 아나운서였던 데이브 진코프는 하프타임에 무려 시가와 살라미 등을 나줘주었으며, 경기 도중 "Diii-pppeer Duuunk, Chaaaam-ber-laaaiinn!!!"이라고 여러번 얘기했다.

윌트가 "Dipper Dunk"를 46초 남겨두고 작렬해 100점을 성공시켰을 때, 허쉬의 아이들은 코트 위로 몰려나와 그들의 영웅을 맞이했다. 마치 프랑스 사람들이 린드버그를 맞이하러 달려나갔을때처럼. (역주: 린드버그는 사상 최초로 대서양을 날아서 단독횡단한 인물)

대단한 쇼였다. 100점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았지만 경기 자체는 금방 잊혀졌다. 수십년 후, 윌트의 100점 경기는 인양되길 기다리는 침몰선과 같다.


-- 당시 허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 리그, 그리고 윌트란 사람을 이해해야한다.

1962년 봄에 대통령 존 케네디와 그의 친구 니키타 흐루쇼프는 핵실험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냉전 대립 중이었다. 윌트 경기 4일 전에 존 글렌(역주: 최초로 우주 궤도를 돈 미국인 우주비행사)는 우주로 날아가 "하루에 4번의 일몰을 본 날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네요"라는 불멸의 대사를 남겼다. 필라델피아에서 400명의 흑인 목사들은 신도들을 이끌고 Tasty Baking Company, Sunoco and Gulf Oil이 흑인 피고용인들에 대한 대접을 개선할 때까지 이들을 보이콧했다. Freedom Riders(역주: 흑백 차별 문제에 싸운 시민 운동가들)은 스포츠계가 아직 흑백분리 정책을 유지하던 남부로 갔으며, 수도 워싱턴에 위치한 레드드킨스 -- 흑백분리를 철폐한 마지막 NFL팀 --은 마침내 그들의 첫번째 흑인 선수와 계약했다.

이 해 가을에 인종문제는 다시 수면으로 오르게 된다. Ole Miss에서 제임스 메레디스는 최루탄과 총이 발사되는 가운데 이 학교 최초의 흑인 학생이 된다. 폭동이 일어났고 두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때 NBA를 지금의 새끈한 리그와 착각하면 안된다. 많은 기자들은 NBA를 대학경기보다 못하다고 보았다. 일부 선수들은 담배를 심지어 하프타임에도 피웠으며, 이들은 호텔방에서 유니폼을 스스로 빨아야했다.

이 시즌에 필라델피아 워리어즈는 인디애나의 고등학교 체육관에서 한 경기를 치뤘다. NBA는 큰 경기장을 갖고 있는 작은 도시 -- 허쉬같은 -- 에서 경기를 치름으로서 새로운 팬층을 얻고자 했다.

NBA는 여전히 백인의 구역이었다. 1962년 당시 선수들 3분의 2는 백인이었다. 흑인 선수들은 자신들의 수를 제한하는 정책이 있다고 확신했다. 미국인의 삶에서 이런 편견은 널리 퍼져있었다. 1958년에 NBA팀중 가장 남단에 위치한 세인트 루이스 호크스는 완전히 백인으로 이뤄진 팀으로 우승했다.

현재 NBA는 30개 팀을 보유하고 있으나, 1961-62시즌 당시는 9개 뿐이었다. 그리고 세인트루이스보다 서쪽에는 로스엔젤레스 레이커스 한 팀 뿐이었다.

미국의 유명 기자들 중 대부분은 프로농구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전설적인 에디터 스탠리 우드워드는 농구에 대해 "짧은 바지를 입고 스포츠를 하는 남자의 남성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든다"고 한 적이 있다. (역주: 당시 농구 유니폼은 핫팬츠에 가까울 정도로 짧았으며, 그 외 미국에서 인기 있는풋볼/야구/하키 등은 모두 긴바지를 입고 경기를 합니다)


-- 1962년에 NBA는 한발을 미래에, 다른 한발은 과거에 놓고 있었다. 농구의 여명시대이던 1890년에 생겨난 세트슈터들도 남아있었다.

그리곤 윌트가 있었다. 크고, 빠르고, 운동능력이 뛰어난 윌트는 농구의 구조를 뒤바꾸어놓았다. 그는 수평적인, 발을 땅에 붙혀놓고 하는 경기를 림 위에서 하는 것으로 바꾸어놓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농구의 베이브 루스였다. 루스가 홈런으로 야구를 뒤흔들어놓은 것처럼, 윌트는 득점과 Dipper dunk로 1960년대를 뒤흔들어놓았다.

물론 두 남자는 다른 공통점도 있었다. 이들은 관중석의 미인들에게 눈길을 두었다. 유부남이었던 루스는 시끄럽고 거칠었으며 한번은 동료들에게 "내가 어제밤 같이 있었던 아가씨 한번 봤어야 됐는데. 몸이 죽여줘! 티끌하나 없더군"이라고 떠벌인 적도 있었다.
미혼이던 윌트는 더 조용했고 자신의 "뚜쟁이"들에 대해 더 조심스러웠다.

한번은 그가 스코어러 테이블에 있는 관계자에게 "골대 밑에 있는 금발이요. 번호 좀 따줘요"라고 귓속말을 했다.


--1962년에 윌트는 최고의 유명인사였다. 그는 미국인들의 평균 연소득이 5천달러 이하일때 7만5천달러를 벌었다. 그는 맨하튼 센트럴 파크 쪽의 고급 아파트에 살았으며 필라델피아로 출퇴근 했다. 그는 Spooky Cadet이란 이름의 경주마를 소유했다.

또한 그는 할렘에 "Big Wilt's Smalls Paradise"란 이름의 역사적인 나이트클럽을 소유했다. 이 클럽에서는 Redd Foxx(역주: 미국의 코미디언 겸 배우)와 Etta James(미국의 가수) 등이 공연했다. 윌트가 클럽을 돌아다닐때는 마치 그가 할렘 전부, 아니 뉴욕 전부를 소유한 것같았다.

그의 팀 동료들은 그에 대해 뭐라고 생각할지 잘 몰랐다. 그들은 경기, 연습, 그리고 공항에서만 그를 봤다.

1961-62년 필라델피아 워리어즈에는 흑인 선수가 세 명 있었고 백인선수가 8명 있었다. 흑백 사이에 사회적인 교류는 매우 적었다. 원정경기에서 백인선수들은 같은 방을 배정받았고, 윌트의 흑인 동료들은 서로 방을 같이 썼다. 윌트는 방을 혼자 썼다.

1961-62시즌의 그 날 이후, 윌트는 NBA의 최고선수들을 찢어발겼다.

당시 스타루키는 확장팀 시카고 패커스의 센터 월트 벨라미였다. 6-10에 슈팅력이 뛰어난 벨라미는 경기당 평균 30점을 넣었다. 그는 Dipper를 상대로 한 첫 NBA경기에서 정식으로 코트 위에 올라가 손을 내밀며 "체임벌린 씨 안녕하십니까? 저는 월터 벨라미라고 합니다"라고 했다.

체임벌린을 손을 뻗어 잡으며 "안녕, 월터? 자네는 오늘 전반에 슛을 못할거야"라고 했다.

그날 Big Bells는 슛을 못 했다. 숨조차 못 쉬었다.

Dipper 때문이었다.

체임벌린은 자유투라인 안쪽에서 벨라미가 쏜 처음 9개의 슛을 블럭했다. 루키 벨라미는 후반에 돌아왔을때 충격을 받았다. 체임벌린은 이번에 손을 내민다음 마치 어린애에게 하듯 "좋았어 월터, 이제 플레이해도 좋아"라고 했다.

그날 필라델피아 워리어즈는 시카고를 쉽게 꺾었고 윌트 체임벌린은 51대 14로 월터 벨라미를 득점에서 압도했다.


-- 미국 사회에서 인종문제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언급한 흑인 선수들은 거의 없었다.

재키 로빈슨은 -- MLB에서 은퇴한지 5년 후에도 -- 기준으로 남아있었다. 로빈슨은 워싱턴 DC에서 사회적 권리를 위한 행진에 참여했고, 로드 아일랜드에서 차별에 대한 연설을 했다. 그는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NAACP) 시위에도 참여했다.

물론 로빈슨은 커피숍 체인인 Chock full 'o Nuts를 위해 일했으며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지원해준 좋은 보스가 있었다.
윌트는 자기 자신대로 살았다. 그는 이 문제를 조용히 접근했다. 그는 자녀들을 여름 캠프에 보낼 때 할렘으로 보냈으며, 자신이 LA에 짓고 있는 아파트 건물에 업자로 참여하는 것은 오직 흑인들 뿐일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는 이런 식으로 추정하는데 시대를 앞서고 있었다.

그는 1960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재키 로빈슨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다른 이들은 아니죠"

그가 60년대 초에 인종 문제에 대해 별 것 아닌 것처럼 대하거나 공개석상에서 수동적으로 대하는 것은 그가 개인차원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자기 자신을 방해하지 못하게 박살냈던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그는 비록 비밀스럽게 했을지라도 백인 여자들을 사귀었다.

그는 자신의 카딜락 스포츠카를 아주 빠른 속도로 몰았다.

그는 리그 내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었다.
1961-62 시즌에 평균 50점을 넣음으로서, 그는 자신의 신체적 우월함을 증명함과 동시에 인종 쿼터제를 적용하며 백인 선수들이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라고 하던 리그를 우습게 만들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대하는 것 이면에서 Dipper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유를 위한 투쟁을 했다. 그냥 공격적이고, 노골적이며 사과하지 않는...Dipper가 됨으로서.


-- 허쉬에서 윌트의 활약은 민간 영웅인 존 헨리가 망치를 들고 강철 드릴을 능가하는 것과 비슷했다. (역주: 존 헨리는 Tall Tale라고 불리는 민간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노동자들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수년 간 뉴욕 닉스 멤버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은 이 경기를 평가절하하려고 했다.

닉스는 실제로 꼴찌팀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주전라인업에 세명의 올스타와 NCAA 우승을 거머쥐고 금메달을 차지한 젊은 센터 Darrall Imhoff가 있었다.

닉스가 열심히 하지 않았거나 신경을 안 썼다고도 한다. 말도 안된다. 실제로 닉스의 올스타 가드 Richie Guerin은 4쿼터에 윌트의 총득점이 80대, 90대로 넘어감에 따라 분노로 얼굴이 벌게졌다. 그는 워리어즈와 체임벌린이 불문율을 어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Guerin은 훌륭한 선수였으며 자존심이 강했다. 그는 허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분노했으며 경기가 끝나기만을 고대했다.

윌트의 득점 중 대부분이 덩크란 것도 사실이 아니다.

그날 허쉬에서 윌트는 페어더웨이, 점프슛, 풋백, 덩크 등으로 63개의 샷 중 36개를 성공시켰다. 닉스는 6-10짜리 센터 둘이 있었지만 둘 중 하나인 필 조던은 뛰지 않았으며 나머지 하나인 Imhoff는 20분만 뛰고 파울아웃당했다.

이 말은 Dipper는 나머지 매치업에서 5인치, 50파운드나 이득을 봤다는 소리다. 마지막 순간에 경기의 리듬이 망가져갈때, 닉스는 3,4명으로 윌트를 감쌌지만 100점을 막지는 못했다.

허쉬에서의 진짜 기적은 체임벌린이 32개의 자유투 중 28개를 넣었다는 것이다. 그는 커리어 51%를 기록한 악명높은 자유투 슈터였다. 닉스는 나중에 허쉬의 rim이 부실하며 이로 인해 윌트가 자유투의 87%를 성공시켰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 주장은 맞는 것이다. 허쉬에서 서커스가 열렸을때 광대들은 붉은 springboard(높이 점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한국말로 뭐였는지 생각이 안 나네요 ^^;;;)를 가져왔으며 동네 아이들이 이걸 가져가서 경기장 옆으로 치워진 골대를 향해 점프해 마치 체임벌린인것처럼 덩크를 하는데 썼다. 이 꼬마들은 덩크 후 메달리곤 했으며 이로 인해 림이 부실해진 것으로 보인다.

윌트 체임벌린은 46초를 남겨두고 100점에 도달했고, 어린 팬들은 그를 축하하기 위해 코트 위로 몰려왔다. 이중에 14살 케리 라이먼은 선두에 있었다.

라이먼의 키는 Dipper의 종아리밖에 오지 않았다. 그는 한참이나 위를 바라봤고 손을 내밀었다. 체임벌린은 그의 손을 잡아 악수를 했다. 라이먼은 이어 심판 윌리 스미스가 윌트에게 공을 건네주고 그가 공을 한번 튀기는 것을 보았다.

어린 라이언은 순간적인 충동에 허클베리 핀(역주: 미국 소설에 나오는 집 없는 소년이며 마음은 착한 비행청소년입니다)이 할 법한 일을 했다.

그는 공을 움켜쥐고 도망쳤다. 팬들 사이로 달아나 경기장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는 이번을 포함해 경기장에 몰래 들어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므로 어디로 가야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동네 순경 둘이 그를 쫓고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잡히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라이먼은 놀이동산을 통과해 언덕으로 올라가 50 West Chocolate Avenue의 자기 집으로 갔다.

순경들은 체력이 형편없었다. 그들은 쫓아가는 걸 포기했다. 어차피 케리 라이먼인 걸 알고 있었는데, 뭐.

체임벌린은 공을 돌려받길 원하지 않은것으로 보였다. 라이먼은 공을 갖고 허쉬의 체육관, 뒷골목에서 몇년간 놀았다.
공의 글자와 가죽이 벗겨졌다. 그러자 라이먼은 이걸 옷장에 넣어두고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윌트가 37년 후 사망했을때 라이먼과 그의 친구는 뉴욕 스포츠 용품 경매장에서 팔았다. 이 물건은 55만1천달러에 팔렸으며, 기념품 중 Honus Wagner의 1910년 야구카드(역주: 데드볼 시대의 전설적인 선수) 와 마크 맥과이어가 홈런 기록을 깼을 당시의 홈런볼이 더 비싸게 팔렸다.

하지만 곧 논란이 생겼다. 필라델피아 워리어즈 소속이었던 팀 관계자 몇명과 워리어즈 선수였던 이는 라이언의 공이 100점 경기 당시 사용된 공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워리어즈 볼보이가 윌트에게 100점 경기볼을 건네준 이후 대체용 공을 라이먼이 훔친게 분명하다고 했다.

뉴욕 경매장은 해당 거래를 중지했으며 조사에 들어갔다. 몇달 후 열린 경기에서 뉴욕 경매장은 라이먼의 공이 100득점 경기볼이 맞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 이 공은  6만7천 791달러에 팔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처음보다 48만 4천달러 적은 값에 팔린 것이다. 이런 일이 간단히 풀리는 경우는 없다.

그렇지만 이 일화 역시 100득점 경기가 신화가 되는데 기여하고 있다.


--  윌트는 복잡한 인물이었다. "골리앗"의 부드러운 측면에 대해 사람들은 몰랐다.

1997년에 NBA가 역대 위대한 50인의 선수들을 기념했다. 체임벌린과 100득점 경기에서의 팀 동료 폴 아리진이 이 팀에 선정됐다.
당시 16세였던 아리진의 손녀 스테파니는 불치병인 뇌종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체임벌린은 그녀의 병세에 대해 듣고는, 편지와 전화를 통해 친구가 되었다.

아리진은 위대한 50인 행사가 열렸던 클리블랜드 올스타전에 휠체어를 탄 스테파니를 데려왔다.

그곳에서 체임벌린은 스테파니와 포옹을 하고, 휠체어를 밀어서 그녀가 올스타들 모두의 사인을 받도록 해주었다.

스테파니는 몇 달 후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날 클리블랜드에서 폴 아리진은 감정에 북밭혀 Dipper에게 말했다. "윌트, 내가 자네에게 빚졌네"

수십년 전 팀동료로서 아리진은 3년동안 체임벌린과 의미있는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들은 나이, 인종, 사회적 관습 등으로 서로 떨어져 있었다. 윌트는 알기 쉬운 대상이 아니었다.
폴 아리진이 이때 느낀 것, 그렇지만 Dipper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은, 허쉬 이후 35년이 지나서야 그들이 진정한 팀동료로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출처 : I Love NBA
글쓴이 : maverick45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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