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nt Hill

[스크랩] The True Warrior, Grant Hill

나비넥타이 2009. 6. 3. 18:48


부상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던 선수들을 볼때마다 필자의 마음 한구석은 아쉬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로 선수생활을 포기해야 했었던 제이 윌리엄스.

제2의 조던으로 지목받기도 했지만 커리어 내내 부상에 시달리고 끝내 쓸쓸히 퇴장해야했던 페니 하더웨이.

혜성처럼 나타나 뉴욕의 상징으로 우뚝섰지만 부상때문에 소리없이 사라진 앨런 휴스턴.

 

이 외에도 부상때문에 쓸쓸히 퇴장한 수많은 선수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상이라는 고난과 역경을 딛고 현재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선수가 하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랜트 힐.

 

신이 내린 재능의 소유자이며 조던의 후계자로써 많은 기대를 받으며 NBA에 입성했지만

지속적인 발목부상때문에 선수생명까지 위협받았던 그랜트 힐.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 몇자 써보려 합니다.

 

 

 

Chapter 1: Around the House

 

그의 아버지 캘빈 힐(Calvin Hill)은 예일대를 졸업한 수재였으며 프로 미식축구 선수였습니다.

어머니 재넷 힐(Janet Hill)은 미국 국방부의 비서였습니다. 그 유명한 미국의 펜타곤이 그녀의 회사였던 것이죠.

그랜트 힐의 삶에는 그의 부모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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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의 부모님은 힐을 엄격하게 키웠습니다.

힐이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무조건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야 했답니다.

만약 정해진 시간에 어머니가 펜타곤에서 아들의 전화를 받지 못하면, 그날은 힐의 제삿날(?) 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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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간에 돌아오지도 않는데 왜 시계가 필요하냐는 어머니의 뜻이었습니다.

 

그랜트 힐이 따라야 했던 집안 내의 엄격한 규율은 힐의 사교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무조건 따랐고 그는 절대 튀는것을 싫어했습니다.

또한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엄격한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는 힐에게 많은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힐은 어린 시절,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Chapter 2: High School

사우스 레익스(South Lakes) 고등학교 시절, 농구부 감독은 그랜트 힐의 자질을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14살에 갓 고등학교에 입학한 새내기 힐에게 Varsity 로 올라오라고 권유하죠.

* 미국 고등학교 농구부는 대부분 3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Freshmen - JV - Varsity.

   Freshmen Team 은 고등학교 1학년생만이 있는 팀이죠.

   Junior Varsity(JV)는 그 위의 레벨에 있는, 한마디로 2군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Varsity가 고등학교를 대표하는, 즉 1군 팀이죠. 상급생들이 대부분 Varsity에서 뜁니다.

 

하지만 힐은 거절했습니다. 자신은 프레쉬맨이니 프레쉬맨 팀에서 뛰겠다고 자청한거지요.

그는 친구들과 함께 뛰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의 농구실력을 친구들과 차별화 시키는 것 보다

친구들과 함께 코트에서 어울려 뛰기를 원했지요. 절대 튀기 싫어하는 성격에서 나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결국 그는 Freshmen 과 JV를 거쳐 Varsity에 올라오는, NBA 선수로써는 꽤 보기 힘든 코스를 밟습니다.

(대부분의 NBA 선수들은 고등학교 프레쉬맨때부터 Varsity에서 뛰는 경우가 많지요)

 

그는 당당히 하이스쿨 올아메리칸(High School All American)에 선정되며 자신의 기량을 입증합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듀크대학에 스카웃 되며 자신의 이름을 NCAA 무대에 알리게 됩니다.

힐이 듀크를 선택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힐에게 농구장학금(Scholarship)을 제의한 대학중에는 듀크 외에도 UNC와 조지타운도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힐이 조지타운에 가기를 원했고 그의 아버지는 힐에게 UNC를 권했습니다.

그래서 힐이 듀크를 선택한겁니다. 엄격한 집안에 신물이 나있던 힐은 부모님이 원했던것의 정 반대인

듀크대학을 선택함으로써 어린시절 처음이자 마지막 반항(?)을 했던겁니다.

 

 

 

Chapter 3: Duke University

그랜트 힐은 듀크대학을 농구명문으로 발돋움 시킨 장본인입니다.

당시의 듀크는 단 한번도 NCAA 우승을 하지 못했던, 농구명문이라 불리기에는 살짝 아쉬운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랜트 힐이 듀크에 온 이후, 듀크는 사상 처음으로 왕조(Dynasty)를 이룩합니다.

 

힐은 1학년때부터 주전자리를 차지하며 듀크왕조 설립에 한몫 했습니다.

 

1991년 파이널 포 게임에서 듀크는 전년도 챔피언인 UNLV를 상대하게 되는데요,

1학년이었던 그랜트 힐은 UNLV의 에이스 스테이시 어그먼(Stacey Augmen)을 6점으로 묶습니다.

그리고 그해 듀크는 결승에서 캔자스를 꺽고 사상 첫 우승을 거머쥡니다.

 

첫 우승 후, 듀크 감독 마이크 슈셉스키(Mike Krzyzewski)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As good an athelete they all had, they didn't have Grant Hill" -Coach K

(그들은 좋은 선수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겐 그랜트 힐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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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크는 다음해인 1991-1992 시즌에도 돌풍을 일으킵니다. 힐은 이때 2학년이었습니다.

1992년 NCAA 결승전은 듀크와 켄터키간의 혈투였습니다.

하지만 듀크는 크리스쳔 레이트너(Christian Laetner)의 역전 버저비터 중거리슛 덕분에

극적인 우승을 거머쥡니다. 이 장면은 NCAA 팬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장면입니다.

 

켄터키가 1점 리드하고 경기종료 2초를 남긴 상태였습니다.

듀크의 그랜트 힐은 베이스라인에서 레이트너에게 30m정도의 롱 패스를 했고

레이트너는 그것을 받아 턴어라운드 점퍼를 성공시켜 게임을 역전시키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당시 듀크의 감독인 코치 케이(*슈셉스키의 별명)는 그랜트 힐에게 롱패스를 할수 있겠냐고 물어봤고

힐은 당당히 할수있다고 나섰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여튼 바비 헐리(Bobby Hurley), 크리스쳔 레이트너(Christian Laetner), 그리고 그랜트 힐을 주축으로

듀크는 2연패를 하면서 NCAA 농구계의 명문으로 올라섭니다.

 

힐은 3학년이 되면서 자연스레 팀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선배인 레이트너나 헐리가 팀의 중심축이었고 힐은 에이스가 될만한 기량을 갖추었으면서도

절대 팀의 리더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항상 득점기회를 선배들에게 양보했으며 클러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듀크의 감독이었던 코치 케이가 힐에게 슛좀 하라고 매번 소리를 질러야만 슛을 쏠정도로 힐은

개인플레이를 자제했다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어렸을때부터 몸에 익힌 예의범절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무한공경을 해야한다는 엄격한 부모님의 가르침 덕분에 힐은 항상 자신의 선배였던

레이트너나 헐리에게 에이스의 자리를 양보했다고 합니다.

 

"He'll do everything you ask him to do, but at times, because he is reluctant to overstep his bounds, you need to say, 'go ahead' because he still wants permission" -Coach K

(그는 당신이 요구하는것을 다 합니다. 하지만 (힐은)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기를 꺼려하기때문에, 당신이 직접 그에게 '괜찮아, 그렇게 해' 라고 말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것을 허락받고 하길 원하니까요)

 

"Respecting your elders, respecting those who are older than you, I think got in the way of my talent, my abilities, my greatness, whatever you want to call it"

-Grant Hill

(선배를 공경하는것, 자기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것 등등..이런게 저의 재능이나 능력에 방해가 됬다고 말할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1992년, 2연패 직후 레이트너가 졸업하고 그 다음해인 1993년 힐의 1년선배인 바비 헐리 역시 졸업 후 NBA로 떠나자

힐은 자연스레 에이스의 역할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이때가 1993-94 시즌이었고 힐은 4학년이었습니다.

 

리더로 거듭난 힐은 듀크를 다시한번 NCAA 토너먼트 결승전으로 이끌었습니다.

힐의 듀크대학 4년 커리어중 3번째 결승진출입니다.

 

비록 결승전에서 아칸소 대학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듀크를 홀로 이끈 힐은 많은 NBA 팬들의 주목을 받았고

드래프트 1순위의 강력한 후보로 거듭났습니다

(하지만 1994년 NBA 드래프트에서 힐은 3순위로 뽑혔습니다. 1위는 글렌 로빈슨, 2위는 제이슨 키드였습니다.)

 

 

 

Chapter 4: Grant Hill in Detroit

 

"Grant Hill, he can do everything. He has a total package" -Kobe Bryant

(그랜트 힐, 그는 모든것을 다 할수 있어요. 그가 바로 토털 패키지입니다.)

 

"Grant is everything good about the NBA" -Doug Collins

(그랜트는 NBA의 모든 좋은면을 소유하고 있어요)

 

당시 NBA는 마이클 조던의 대체자를 찾는데 급급했습니다.

조던이 3연패 달성 후, 돌연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이지요.

많은 언론과 팬들은 포스트 조던으로 그랜트 힐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1994년 NBA 드래프트 3순위로 디트로이트에 뽑힌 그랜트는 많은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루키였지만 NBA 베테랑의 플레이를 선보이며 그는 NBA에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올랐습니다.

힐은 루키시즌때 올스타 투표 1위를 기록하며 그의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루키로써 올스타전에 참가한 힐은 10점을 기록합니다)

또한 제이슨 키드와 신인왕을 공동 수상한 힐은 순탄한 NBA 커리어를 이어갑니다.

 

전국구 스타가 된 힐은 수많은 광고모델 계약을 제의받았으며, NBA가 직접 나서 그랜트 힐 마케팅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2년차인 1996년 올스타전에도 올스타 투표 1위를 기록하며 당당히 올스타전에 출전했고 디트로이트를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으며,

1996년 올림픽팀에 선발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꿈만같은 NBA 생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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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97 시즌, 디트로이트는 54승 28패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플옵에 다시금 진출했고, 그 중심에는 NBA의 아이콘 그랜트 힐이 있었습니다.

특히 MVP 투표에서 칼 말론, 마이클 조던에 이은 3위를 차지하며 미래의 MVP 0순위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같은 시즌, 그랜트 힐은 팝스타 타미아 워싱턴(Tamia Washington)과의 미팅에서 눈이 맞아 결혼에 성공하기도 합니다~

(..부럽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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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의 4번째 시즌이었던 1997-98시즌, 디트로이트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합니다.

시즌 직후, 피스톤스의 감독이었던 덕 콜린스(Doug Collins)는 해고당했고 많은 언론들이 그랜트 힐의 능력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언론들은 심지어 힐의 낙천적인 성격을 헐뜯기도 했습니다.

이는 힐에게 엄청난 동기여부가 되었는데요, 시즌 직후 여름동안 힐은 엄청난 훈련량을 소화하며 그 다음 시즌인

1998-99시즌에서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며 모든 언론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디트로이트는 다시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힐은 여전히 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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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0 시즌이 그랜트 힐의 커리어중 최고의 시즌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평균 26득점에 6.6 리바운드, 5.2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스탯상으로도 최고의 시즌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힐의 불운이 슬슬 시작됩니다.

2000년 플레이오프 시즌이 다가올때즈음 힐은 발목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디트로이트 팀 의료진은 힐의 부상은 발목의 뼈 타박상(bone bruise)이며 게임에 뛰는게 가능하다고 진단했습니다.

물론, 플레이오프 무대이니만큼 힐은 뛰기를 원했고 결국 마이애미와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 시리즈에 출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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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피스톤즈 팀 의료진의 진단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마이애미와의 1라운드 2차전 경기에서 힐은 발목통증을 호소하며 스스로 교체를 요구했고 경기 후 피스톤즈 의료진은

다시 힐의 발목을 진단하는데 이번에는 다른 결과가 나왔던 것입니다.

 

바로 발목 골절(Ankle Bone Fracture)이었던 것입니다. X-Ray에 의하면 힐의 발목 뼈가 완전히 부러져 나갔다는겁니다.

결국 힐은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고, 그의 시즌은 끝이 났습니다.

 

마침 힐과 디트로이트와의 계약도 끝이 났던 참이었습니다.

99-00시즌 직후로 힐은 자유계약(FA) 선수로 풀려났고, 많은 팀들이 그랜트 힐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랜트 힐은 올랜도 매직(Orlando Magic)과 7년, 총 $92million에 육박하는 장기계약을 맺었습니다.

같은해에 매직은 또다른 FA였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Tracy McGrady)를 영입하면서 우승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습니다.

 

 

 

Chapter 5: Grant Hill in Orlando

올랜도에서의 힐의 첫 시즌은 4경기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힐을 괴롭혔던 발목 골절이 재발한 것입니다. 그것도 이미 수술받은 발목에 말이죠.

00-01시즌, 올랜도가 계획했던 힐-티맥의 원투펀치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비록 시즌아웃이 된 힐이었지만 팬들은 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힐은 뛰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팬투표에 의해 올스타에 선정된 것입니다. 그만큼 힐의 인기는 독보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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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랜도에서의 두번째 시즌. 01-02시즌때 미국내 독보적인 스포츠 잡지 Sports Illustrated는 그랜트 힐이 올랜도 매직을

NBA Finals로 이끌거라는 기사를 냈습니다. 그만큼 매직의 로스터는 탄탄했습니다.

대럴 암스트롱(Darrel Armstrong), 트레이시 맥그레디, 그랜트 힐, 호레이스 그랜트(Horace Grant), 패트릭 유잉(Patrick Ewing)

팬들은 매직의 비상을 기대했고 힐의 부활을 바랬습니다.

하지만 힐은 14경기를 뛰고 다시한번 시즌아웃을 당하고 맙니다.

이번에도 역시 발목 골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골절이 아닌, 피로 골절로 판결났습니다.

첫번째 시즌때 시즌아웃 부상을 당한 힐은 오프시즌때 너무 열심히 훈련에 매진했던게 탈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무거운 운동량을 힐의 발목은 감당하지 못했던겁니다.

 

02-03시즌, 힐은 다시한번 부활에 성공했습니다.

팬들은 다시금 기대를 갖게되었고 많은 이들이 올랜도를 다크호스로 꼽았습니다.

2003년 1월 16일, 올랜도는 워싱턴 위저즈(Washington Wizards) 와 경기를 가졌습니다.

이날, 그랜트 힐은 생애 마지막으로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과 조우를 하게되었습니다.

그의 우상이었던 조던과의 마지막 맞대결은 힐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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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조던은 32점을 퍼부었지만 힐은 2점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힐은 다시한번 발목수술을 받게됩니다.

 

똑같은 부상이었습니다. 똑같은 발목이었습니다. 그리고...또 한번의 시즌아웃 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힐은 03-04시즌을 통째로 날려버립니다. 맥그레이디와 주완 하워드(Juwan Howard)가 팀의 재건을 위해

힘쓰고 있을때, 힐은 벤치에서 그들을 지켜봐야 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해인 04-05시즌, 힐은 드디어 고대하던 컴백에 성공합니다. 시즌 67경기를 뛰었고, 평균 19.7점 4.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그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팀은 망가질대로 망가진 후였습니다.

맥그레이디와 주완 하워드는 휴스턴으로 트레이드 된 후였고, 올랜도에 새로 합류한 프랜시스는 기대만큼의 효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매직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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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시즌, 힐은 다시한번 부상에 신음하고 맙니다.

21경기를 소화해 냈으며 힐은 올랜도와 함께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다시한번 다음시즌을 기약해야 했던 것입니다.

 

올랜도와의 계약 마지막 해인 06-07시즌, 힐은 65경기를 소화하며 올랜도에서의 마지막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팬들의 맘속에 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많은 팬들은 힐이 올랜도를 떠나기를 바랬습니다. 힐이 처음 올랜도에 왔을때 기뻐하며 반겼던 그 팬들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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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랜도의 투자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힐은 올랜도에서의 7년동안 204경기를 뛰었습니다.

기대했던 힐-티맥 원투펀치 효과는 아예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리고 힐은 쓸쓸히 올랜도라는 무대에서 퇴장합니다.

 

 

 

Chapter 6: Grant Hill's Late Run

현재 힐은 피닉스에서 부활의 날개짓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같은 몸놀림은 아닙니다. 예전같은 기량 역시 아닙니다.

하지만 농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박수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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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부상때문에 여러번의 시즌아웃 부상을 당했지만 그는 항상 돌아왔습니다.

계속 쓰러지고 무너져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의 큰 부상을 자주 당했지만 그는 항상 재활을 택했습니다.

아직 못이룬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온 그야말로 True Warrior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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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힐은 정말 불운한 선수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포스트 조던이 될 모든것을 갖추었으면서

부상때문에 그 재능을 다 피우지 못한게 정말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올랜도 시절 힐이 건강했다면

동부의 판도는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군요.

 

현재 그는 즐겁게 농구를 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주연이 아닌 조연의 역할을 하고있지만, 언젠가 힐도 반지를 한번 껴봤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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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 I Love NBA
글쓴이 : 떠돌이 검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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