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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Goodbye. Kevin Garnett.

나비넥타이 2016. 9. 29. 23:58


제가 NBA를 보면서 가장 좋아했던 두 선수가 있었습니다.

두 선수에게는 공통점들이 많았습니다. 뛰어난 실력, 잘생긴 얼굴, 역대급 명언들을 남겼다는 점 등등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그들에게 빠져들게 했던 공통점은 뜨거운 전사의 피와 심장을 가지고 코트 위에서 싸웠다는 점입니다.

문제가 전혀 없는 모범적인 선수들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농구선수로서 그들이 보여준 열정은 제 마음을 불태우기 충분했습니다.

한 선수는 2013년에 먼저 코트 위를 떠났습니다. 정말 많이 슬퍼했고 한동안 그 선수의 영상만 틀어놓고 지냈습니다. 그의 영구결번식 날 학교 수업을 당당히 째고 방송을 틀어서 봤을 정도로 그 선수는 저에게 있어서 영웅이었고 최고의 슈퍼스타였습니다.


남은 한 선수도 2015-2016 시즌을 마지막으로 코트 위를 떠났습니다.

루머들이 돌았을 때 설마 하는 심정으로 넘겼습니다. 그는 여기서 멈출 선수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의 몸상태는 생각 이상으로 나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더이상 뛸수 없을꺼라는 판단을 하고 마음을 정리하고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며칠동안 그렇게 좋아했던 농구를 해도, 슈퍼스타들의 영상을 봐도 힘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가 입었던 져지의 번호가 보일때마다 많은 관중들 앞에서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개선장군처럼, 백수의 왕 사자처럼 포효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인터넷을 끄적이면서 은퇴를 번복하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으로 계속해서 체크를 했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이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케빈 가넷이 21년간의 긴 여정을 끝내고 코트 위를 떠났다는 걸 말입니다. 

그를 보내기 전에 코트 위의 전사였던 그의 이야기를 간단히 써보기로 했습니다.


가넷은 1976년 5월 19일 사우스 캐롤라이나 그린빌에서 Shirley Garnett 과 O'Lewis McCullough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친부와의 혼인없이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가넷은 어머니가 양부와 결혼하기 전까지 어머니 혼자서 가넷 남매를 키워야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가넷은 어린 시절 한동안 아버지 없이 사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이후 친아버지와 교류가 없는 것도 그러한 이유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의 KG의 모습.


가넷이 12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양부와 결혼해서 사우스 캐롤라이나 몰딘으로 이사했습니다. 여기서부터 가넷의 농구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고등학교를 다니기 전까지 체계적인 농구를 배우지 않았지만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농구라는 스포츠의 매력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후 가넷은 몰딘 고등학교에서 좋은 신장과 뛰어난 농구 센스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몰딘 고등학교 시절의 가넷.


 

하지만 뜻밖의 시련이 가넷에게 찾아왔습니다. 백인 학생들과 흑인 학생들이 패싸움을 벌이는 사건이 터졌는데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가넷은 이 사건 주변에 있었을 뿐 직접적인 개입은 하지 않았는데 단지 흑인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잡혔던 것이었죠. 한창 감수성이 풍부한 사춘기 시기에 인종차별을 당한 가넷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몰딘에 대한 애정이 사라졌고 결정적으로 몰딘을 떠나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훗날 가넷이 스펜서 헤이우드에게 감사하고 존경을 표했던 것은 고졸생이 드레프트에 참가할 수 있도록 길을 연 개척자였다는 점 뿐만 아니라 백인들의 차별이 절정기였던 그때에 인종차별과 맞서 싸워서 법적으로 이긴 선배였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정든 몰딘을 떠난 가넷이 간 곳은 시카고에 있던 패러것 커리어 아카데미였습니다. 비록 인종차별의 아픔을 겪었지만 가넷은 좋아하는 농구에 열정을 쏟아부으며 아픔을 달랬습니다. 그렇게 농구에 집중하기 시작한 가넷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면서 대활약을 하기 시작하는데 패러것 커리어 아카데미에서 28승 2패의 기록을 세우며 USA Today에 National High School Player of the Year에 선정되었고, 일리노이주의 Mr.Basketball에 선정되는등 승승장구하더니 맥도날드 올 아메리칸 게임에서 18점 11리바운드 4어시스트 3블록을 올리고 Most Outstanding Player에 선정되는등 고교 선수로서 화려한 커리어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청소년기를 화려한 커리어로 보낸 가넷은 1995년 NBA 드래프트에서 참가신청을 합니다.(사실 대학진학을 생각 안한 것은 아니나 성적 문제가 있었죠.)


재능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학창시절의 가넷.


1995년 드래프트...

안토니오 맥다이스, 제리 스텍하우스, 라쉬드 월라스, 테오 레틀리프, 마이클 핀리등 걸출한 선수들이 나왔던 드래프트였죠.

비록 고졸 출신이긴 했지만 고등학교에서 뛰어난 기량과 무한한 포텐셜을 보여준 가넷은 전체 5순위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 뽑힙니다.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1989년에 창단된 짧은 역사를 지닌 팀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약체로서 팀을 강팀으로 이끌어 줄 스타 포텐을 지닌 선수가 필요했던 팀이었기에 케빈 가넷을 지목했는데 이때부터 우리가 아는 가넷의 NBA 커리어가 시작됩니다.(케빈 가넷은 1975년 이후로 첫 번째로 고등학교에서 졸업하자마자 NBA에 드래프트 된 선수라고 합니다.)


스턴과 악수하며 웃는 가넷의 모습.


1995-1996시즌, 케빈 가넷은 평균 10.4점 6.3리바운드를 올리면서 NBA All-Rookie Second Team에 이름을 올리며 순조로운 시작을 알렸습니다. 다른 슈퍼스타들의 루키시즌에 비하면 다소 평범한 시작이었지만 이후 가넷은 자신이 NBA에서도 통한다는 걸 경험하면서 자신감을 얻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면서 점점 슈퍼스타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고등학생같은 루키 가넷의 모습.



1996-1997시즌에 미네소타는 케빈 가넷과 함께 미네소타를 이끌어 갈 콤비로 점찍어둔 그 해에 지명되었던 루키 스테판 마버리를 트레이드로 영입해 가넷 -마버리 콤비를 만들었습니다. 예상은 적중했고 가넷은 이전보다 좋은 스텟을 보여주며 첫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쾌거를 이루었고 마버리와 함께 팀버울브스를 플레이오프에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진출시키는데 성공합니다.(정규시즌 성적 40승 42패) 비록 1차전에서 빅3(바클리 - 드랙슬러 - 올라주원)가 이끄는 휴스턴 로켓츠에게 스웜으로 패배해 탈락했지만 신인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어 이룬 놀라운 성과였고 이들의 미래는 밝아 보였습니다.


미네소타의 미래였던 가넷, 마버리 콤비.


1997-1998시즌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가넷과 6년 연장계약을 맺었는데 계약금액은 무려 126밀로 당시로서는 최고수준의 천문학적인 계약금액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가넷은 자신이 그만한 돈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일취월장한 기량으로 팀을 45승 37패로 더 나아진 성적으로 팀을 플레이오프에 이끄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1라운드에서 글러브 게리 페이튼이 이끌던 서부의 강호 시애틀의 벽을 넘지 못하고 2승 3패로 아쉽게 탈락하고 맙니다. 비록 1라운드에 또 탈락했지만 가넷 -마버리 콤비의 미래는 밝아 보였는데 이것이 미네소타에서의 마-가 콤비가 보여준 마지막 활약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가넷의 높은 연봉과 우대로 인한 내분 때문이었습니다.

미네소타의 케빈 맥헤일 단장은 팀의 미래로 지목한 가넷을 지나치게 편애했는데 때문에 다른 팀원들의 불만이 거셌습니다. 그 중심에는 스테판 마버리, 크리스쳔 레이트너, 탐 구글리오타 등이 있었죠. 마버리는 가넷에게 가려져 2인자 역할을 하는 것을 싫어했고 결국 뉴저지로 트레이드 되면서 미네소타의 미래라 불렸던 가넷 - 마버리 콤비는 아쉽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내분으로 무너진 미네소타의 늑대 콤비 가넷과 마버리.


가넷과 마버리가 오기 전에 팀의 중심이었던 구글리오타와 레이트너도 마찬가지였는데 두 선수다 가넷보다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한만큼 프라이드가 강한 선수들이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고졸 애송이가 지나치게 단장의 편애를 받았으니 참을수가 없었던 것이었죠. 특히 구글리오타의 경우 가넷이 에이스로 떠오르기 전까지 실질적인 팀의 중심이었고 그만한 공을 세웠던지라 더욱 분할만 했죠. 이후 구글리오타, 레이트너도 팀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미네소타의 가넷에 대한 편애가 그를 외로운 늑대대장의 삶을 만든 원인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스테판 마버리가 팀을 떠났지만 가넷은 계속 성장하면서 슈퍼스타 대열에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가넷을 돕기 위해 미네소타에서는 새로운 조력자들을 구했는데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터렐 브랜든이었습니다.

순박한 얼굴을 하고 있는 터렐 브랜든.


키는 작았지만 뛰어난 스피드와 좋은 미들슛을 바탕으로 뛰어난 득점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퓨어가드처럼 패스를 뿌릴 수 있었던 

뛰어난 가드 터렐 브랜든은 마버리가 떠난 후 미네소타가 새로 짝지어준 가넷의 파트너였습니다. 이타적인 마인드까지 가지고 있었던랜든이었기에 가넷과의 궁합은 최고였죠. 브랜든의 서포트 하에 가넷은 20-10을 꾸준히 달성하면서 슈퍼스타로 성장했지만 미네소타는 여전히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넘지 못하고 고배를 마셨습니다. 게다가 브랜든이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당해 선수 생활을 마감함으로서 3년만에 가넷은 든든한 동료를 잃게 됩니다. 더욱 가넷을 외롭게 한 사실은 미네소타가 드래프트로 뽑은 가넷의 조력자들이었는데 월리 저비악, 월리엄 에이버리가 바로 그들이었죠. 에이버리는 루키시즌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리그를 떠났고 저비악은 실력 대비 비싼 몸값으로 훗날 구단 운영에 큰 지장을 주었고 수비를 등한시하는 태도로 팀의 구멍이 되는등 골칫거리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무능한 동료들이 드레프트 된 것보다 더 가넷을 힘들게 만든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그 유명한 조 스미스 사건이었습니다.



NBA 역사에 남을 사건의 주인공 조 스미스.


조 스미스는 가넷과 드래프트 동기로서 1라운드 1픽에 지명된 유망한 선수였습니다. 비록 1픽치고는 크게 성장하지 못했지만 괜찮은 기량을 지닌 선수였습니다. 구글리오타가 팀을 떠난후 가넷의 파트너가 될 선수가 필요했던 미네소타는 그 대체자로 조 스미스를 지목하고 1년 계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후 스미스는 시즌이 끝날 때마다 1년 계약을 체결해가며 2시즌동안 미네소타에 잔류하게 된되었는데 많은 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 스미스의 기량에 비해 너무나 짧은 기간에 적은 연봉을 받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스미스는 돈 욕심이 많기로 소문난 선수였기 때문에 더더욱 수상했죠.


결국 이것이 부정한 계약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NBA 사무국은 미네소타가 스미스를 헐값의 1년 계약 세 번으로 다른 팀의 계약 요청을 거절할 수 있게 했던 것은 스미스에게 그가 래리 버드 권리를 획득하는 01-02 시즌부터 약 4000만 달러에서 8600 달러에 이르는 거액의 장기 계약 체결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냅니다. 사실 미네소타는 지난 1997년 케빈 가넷과 거대 장기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샐러리 여분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좋은 자유 계약 선수를 오프 시즌동안 영입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즉, 미네소타는 이면 계약을 통해 3년동안 헐값에 스미스를 보유하고자 했던 것이었죠. 이러한 미네소타의 불법행위에 분노한 사무국에서는 핵폭탄급의 파괴력을 지닌 강력한 징계를 내립니다.


2001년부터 5년간 미네소타의 드래프트 1라운드 권리 박탈 

350만 달러의 벌금 

미네소타와 조 스미스의 00-01 시즌 계약 파기 

조 스미스의 지난 2년간 계약 파기 

 

결국 부정한 행동을 한 미네소타는 아까운 벌금만 날리고 조 스미스 또한 날렸으며 지난 계약까지 백지화 되면서 버드 권리조차 얻지 못하게 되었죠.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1라운드 드래프트 권리를 박탈당해 선수 수급을 못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미네소타의 발목을 두고두고 잡게 되었죠. 결과적으로 FA로도 제대로 선수를 수급하지 못하는데 유망주까지 수급하지 못하게 된 미네소타에서 가넷은 더욱 홀로 고분고투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뼈아픈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가넷은 꾸준히 전성기를 달리기 시작했는데 2003년까지 가넷은 All-NBA First Team 에만 두번이나 선정되면서 (2000, 2003) 리그 최고의 파워포워드로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2000년부터 2003년까지 4년 연속 NBA All-Defensive First Team 에 선정되는등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서도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가넷이 무엇보다 바라던 것은 수상이 아닌 승리였습니다. 본인이 최고의 선수로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팀이 제대로 서포트를 못해주니 승리를 하지 못해 지치기 시작했던 것이었죠. 연속 플레이오프 1라운드 탈락의 고배를 계속 마시면서 지쳐갔지만 가넷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마침내 2003-2004시즌에 드디어 빛이 보게 됩니다. 그가 최전성기에 오르던 때에 샘 카셀라트리 스프리웰이라는 훌륭한 조력자들을 얻음으로서 드디어 지긋지긋한 1라운드를 넘어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이었죠.



가넷이 농구다운 농구를 할 수 있게 해준 서포터 샘 카셀과 라트리 스프리웰.

라트리 스프리웰은 한때 리그 정상급 슈팅가드였던 선수로서 맨탈에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기량만큼은 출중했던 선수였습니다. 샘 카셀은 잔부상이 많고 볼을 오래 가지고 있는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리그에서 손꼽을 정도로 유능한 1번 자원이었죠. 그런 그들이 오른팔,왼팔로서 게임운영과 득점을 도와주니 자신만의 플레이에 전념할 수 있게 된 가넷은 더욱 훨훨 날아다녔고 그것은 미네소타의 상승세로 이어졌습니다. 2003-2004시즌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58승 24패로 디비전 1위, 서부 컨퍼런스 1위라는 구단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고 팀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케빈 가넷은 정규시즌 MVP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리그 최고의 선수가 된 가넷.


가넷이 이끄는 미네소타의 상승세는 플레이오프에서도 이어졌습니다. 1라운드에선 덴버를 4승 1패로 가볍게 이기고 2라운드에서는

2000년대 초반 서부 최강팀이었던 크리스 웨버의 킹스를 상대로 4승 3패로 승리를 거둠으로서 생에 처음으로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하는 기쁨을 맛봅니다. 하지만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의 상대는 슈퍼스타 4인방으로 구성된 전당포 레이커스였습니다. 강력한힘을 지닌 팀을 상대해야 하는데 사령탑이었던 카셀이 부상으로 아웃이 되어 버렸죠. 결국 MVP 가넷의 도전은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2승 4패로 레이커스에게 패함으로서 끝나게 됩니다. 


비록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떨어지긴 했지만 두 선수의 서포터를 받아 훨훨 날아다니며 MVP를 받은 가넷의 미네소타는 다음 시즌을 기대하기 만들기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2004-2005 시즌이 가넷에게 안겨준 것은 절망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잘했던 스프리웰과 카셀이 부상에 시달리며 맥을 못쳤던 것이었죠. 가넷은 고분고투했으나 혼자만의 힘으로 험난한 서부에서 살아남는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 과정에서 케빈 가넷은 무릎 부상을 당하게 되는데 팀을 이기게 하기 위해 무릎의 통증을 이겨내고 경기를 뛰었는데 이때 무리한 것이 폭탄이 되어 남은 커리어 내내 가넷을 괴롭히게 됩니다. 결국 미네소타는 44승 38패로 2004-2005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는 대참사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 더 절망스러운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라트리 스프리웰 사건이었습니다. 미네소타의 연장계약 제시를 스프리웰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면서 걷어차 버렸던 것이었죠. 그리고 미네소타는 자주 부상을 당했던 카셀의 몸상태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재계약을 꺼려했습니다. 결국 가넷은 보좌했던 스프리웰과 카셀은 팀을 떠나게 되고 또다시 외롭게 싸우는 늑대대장이 되고 맙니다. 2005-2006시즌 미네소타는 33승 49패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두었고 가넷은 무릎 부상으로 마지막 8경기를 결정하는등 초라한 시즌 마무리를 보냈습니다. 2006-2007시즌 케빈 가넷은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며 날뛰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3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맙니다. 이 기간은 케빈 가넷의 커리어의 암흑기였다고 평가하는데 그 유명한 가넷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기고 싶다는 인터뷰도 이 시기에 있었죠. 가넷은 팀의 한계를 느꼈고 미네소타 또한 가넷을 중심으로 한 팀의 구성에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린 가넷의 모습.



2006-2007 시즌이 끝나고 드래프트가 끝났을 무렵, 동부에서는 커다란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예상보다 낮은 픽인 5픽을 건진 보스턴 셀틱스는 칼을 뽑아들고 어중간한 유망주들을 뽑느니 폴 피어스를 중심으로 올인을 해서 우승을 노리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됩니다. 데니 에인지 단장의 주도하에 셀틱스는 본격적으로 움직임을 보였는데 첫 시작은 바로 리그 최고의 3점슈터 레이 알렌을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셀틱스는 월리 저비악 + 딜론테 웨스트 + 07 드래프트 5번픽을 시애틀에게 주고 레이 알렌을 받아오는데 성공합니다. 폴 피어스, 레이 알렌이라는 정상급 스코어러들을 갖춘 셀틱스는 팀의 중심이 될 빅맨을 찾았는데 그들이 원하는 조건을 다 갖춘 주인공은 바로 미네소타에서 우승에 목이 말라있던 케빈 가넷이었습니다.


최정상급 빅맨인 케빈 가넷을 데려오기 위해 보스턴 셀틱스는 알 제퍼슨+ 티오 레틀리프 + 라이언 곰즈 + 제랄드 그린 + 세바스찬 텔페어 + 2009년 로터리보호 1라운드 픽 + 보스턴으로 넘어간 미네소타 1번픽을 제시했고 미네소타와 가넷은 이 딜에 동의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보스턴 빅3가 탄생했고 케빈 가넷은 NBA에서 처음으로 최고의 동료들과 함께 농구를 하게 됩니다.


2007-2008시즌을 지배한 보스턴 빅3의 모습.


처음 빅3가 결성되었을때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지만 동시에 정상을 밟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급조된 빅3였는데다가 많은 자원들을 잃었기 때문에 우승은커녕 동부 컨퍼런스조차 넘을 수 있을지 의문을 가졌던 것이었죠. 하지만 가넷에게는 충분했습니다. 미네소타에서 혼자서 모든걸 다했던 그에게는 지금보다 좋은 기회가 없었던 것이었죠. 빅3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잘 알고 있던 에인지는 추가적인 영입을 통해 제임스 포지,글렌 데이비스, 에디하우스등 롤플레이어들을 보강했고 이후 시즌 도중 샘 카셀, PJ 브라운등을 영입해 빅3를 보좌하게 합니다. 좋은 동료들을 얻은 가넷은 개막전 상대인 워싱턴을 철저하게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부활의 신호를 알렸습니다. 미네소타에서와는 달리 폴 피어스와 레이 알렌이라는 최고의 스코어러들을 동료로 둔 가넷은 수비와 리바운드,허슬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결과 보스턴 셀틱스는 막강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66승 16패라는 2007-2008시즌 최고의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가넷은 퍼스트팀, 디팬시브 퍼스트팀 선정은 물론이고 커리어 최초로 Defensive player of the year에 선정되는 기쁨을 누립니다.


수비왕 상을 받은 가넷과 축하해주는 동료들의 모습.


이후 보스턴은 강적 애틀란타,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차례대로 꺾고 파이널에서 코비 브라이언트가 이끄는 레이커스를 꺾고 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 가넷은 자신의 염원을 이루어준 셀틱스의 로고에 입을 맞추고 동료들을 껴앉고 기쁨의 함성과 눈물을 흘리는 등 자신의 흥분된 감정을 마음껏 표현했습니다.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가넷은 자신의 최고의 명언 Anything is possible을 외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정상의 자리를 만끽하죠.



로고에 입을 맞추는 가넷.


Anything is possible~!!!!


이때 저도 함께 울었습니다.(ㅠㅠ)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데 성공한 케빈가넷은 2008-2009시즌에도 팀의 중심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맴버들간의 호흡이 맞기 시작한 셀틱스는 더욱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승후보로서의 저력을 보여주었죠. 하지만 이때 셀틱스의 기세를 멈추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바로 미네소타에서 혹사당하면서 망가지기 시작했던 가넷의 무릎이 드디어 터졌던 것이었죠. 이때 가넷은 겨우 57경기 소화에 그쳤고 생애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전 경기를 결장하게 됩니다. 팀의 중심이었던 가넷의 이탈로 셀틱스는 플레이오프에서 안타깝게 떨어지고 맙니다. 2009-2010시즌 가넷은 무사히 코트로 돌아왔지만 노쇠화의 시작과 부상의 여파로 특유의 기동성과 순발력을 상실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팬들을 안타깝게 합니다. 가넷뿐만 아니라 폴 피어스와 레이 알렌 역시 노쇠화의 징조가 보임으로서 셀틱스의 전망은 어두워 보이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케빈 가넷은 클라스를 증명하듯 13번째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성장한 라존 론도라는 조커와 노장들의 투혼을 바탕으로 셀틱스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웨이드의 마이애미, 르브론의 클리블랜드, 하워드의 올랜도를 격파하고 또다시 파이널에 진출하는 저력을 보여줍니다.


파이널에서 만난 상대는 2008-2009시즌 챔피언이었던 코비의 레이커스였습니다. 가넷과 셀틱스 선수들은 고분고투했지만 결국 7차전에서 레이커스에게 패배 우승을 아깝게 놓치고 맙니다. 이때 셀틱스의 선수들은 눈물을 흘리고 아쉬워했는데 그들이 파이널에서 우승할 마지막 기회였음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다시 한번 파이널까지 진출했던 2009-2010 셀틱스.


이후에도 보스턴 셀틱스에서 가넷의 우승을 향한 도전은 계속되었습니다. 저메인 오닐,샤킬오닐,네이트 로빈슨등 선수들을 보강하면서 다시 한번 기대를 모았던 셀틱스는 2010-2011시즌을 순조롭게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도중에 선수들의 줄부상으로 힘을 잃은 셀틱스는 겨우 동부 컨퍼런스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됩니다. 1라운드에서 뉴욕 닉스를 쉽게 물리치고 2라운드로 진출하지만 르브론 제임스,드웨인 웨이드,크리스 보쉬가 뭉친 마이애미 히트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떠오르는 태양 마이애미 히트 앞에 지는 태양이었던 셀틱스는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2011-2012 시즌 더 약해진 전력으로 시작한 셀틱스에게 더이상 기대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이제 언제 해체되느냐 그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케빈 가넷은 팀을 위해 그렇게 싫어했던 센터 포지션을 소화하기 시작하면서 성장한 라존 론도와 함께 팀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로 이끌었고 동부 최강의 전력을 과시하던 마이애미 히트를 벼랑 끝까지 몰아넣는 대단한 힘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막판에 지칠대로 지친 셀틱스는 결국 마이애미 히트에게 7차전을 내주며 패배하고 맙니다. 이후 레이알렌은 보스턴을 떠났고 이렇게 해서 짧고 굵었던 보스턴 빅3의 시대가 끝나고 맙니다. 이후에도 가넷은 팀의 중심으로 성장한 론도와 함께 셀틱스에서 우승을 노렸지만 시즌 도중 론도의 부상으로 아웃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이후 보스턴은 리빌딩을 선언했고 가넷은 피어스와 함께 묶여서 트레이드 되어 데런 윌리엄스가 이끌던 브루클린 네츠에서 마지막으로 우승을 노렸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맙니다. 



브루클린 네츠 유니폼을 입고 있는 가넷의 모습.


우승에 실패한 브루클린은 결국 데런 윌리엄스 중심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격변기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가넷과 함께 보스턴에서부터 한솥밥을 먹던 피어스는 워싱턴으로 떠나고 맙니다. 더이상 가넷이 브루클린에서 있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브루클린 역시 팀의 판을 새로 짜야했기에 가넷이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브루클린에게 손을 뻗은 구단이 있었으니 바로 가넷의 친정이었던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였습니다. 당시 미네소타는 케빈 러브의 시대를 끝내고 리빌딩을 선언했는데 트레이드로 좋은 유망주들을 많이 얻었지만 그들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베테랑이 필요했습니다. 미네소타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던 리빙 레전드 가넷은 최고의 적임자였던 것이었죠. 브루클린 입장에서는 늙고 비싼 가넷을 보낼 기회였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결국 브루클린 네츠는 테디어스 영을 받고 케빈 가넷을 미네소타에게 내주는데 합의하게 됩니다. 당시 가넷에게는 트레이드 거부권이 있었기에 원했다면 트레이드를 거부할 권리가 있었지만 브루클린에 있을 이유도 없었고 친정에서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하고 싶었던 가넷은 트레이드를 승낙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네소타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던 가넷은 친정팀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늑대대장 가넷의 귀환.


케빈 가넷의 복귀전 티켓이 추가로 1000장이 팔렸습니다. 세월이 지났지만 팬들은 미네소타의 늑대대장이었던 가넷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복귀전 미네소타의 많은 팬들은 가넷의 복귀를 열혈히 환영했습니다. 그중에서도 Jiggly Boy 라고 불리는 가넷의 유명한 광팬이 있었는데 과거에 가넷이 한창 슈퍼스타로 떠오르고 있을때 옷을 벗고 춤을 추다가 쫒겨난 적이 있던 팬이었죠. 가넷이 돌아오자 자녀들과 함께 와서 또다시 옷을 벗고 춤을 주면서 가넷의 귀환을 환영하는데 이 모습을 본 가넷은 방긋 미소를 지으면서 회답했죠. 이렇게 많은 팬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케빈 가넷은 미네소타에서 커리어의 마지막을 보내게 됩니다.


골수 팬 Jiggly Boy의 대환영 쇼(?)에 미소를 지으면서 응답하는 가넷.


케빈 가넷은 적은 출장시간을 소화하면서 어린 선수들의 락커룸 리더에 충실하게 됩니다. 예전처럼 높게 뛰지도 못하고 엄청난 활약을 하지는 못하지만 케빈 가넷이 선수단에 있는 것만으로도 미네소타 선수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특히 리그에서 가장 유망한 빅맨중 한명인 타운스는 케빈 가넷에게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울수 있는 행운을 누리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가넷도 식지 않은 열정으로 리그에서 계속 뛰길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더이상 선수로서 뛸 수 없는 상태까지 오고야 말았죠. 2015-2016 시즌을 마치고 자신의 몸상태로 고민하던 가넷은 한계를 인정하고 21년간 그가 몸담아 왔던 코트를 떠나게 됩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누구에게나 영웅이나 우상이 있듯 저에게도 그러한 농구선수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케빈 가넷과 앨런 아이버슨이었죠.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가넷의 활약을 보고 즐거워했던 꼬마가 사회인이 되어서 자신의 농구 영웅의 은퇴까지 지켜봤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면 안되는데...

성장하는 어린 선수들과 함께 플레이오프를 밟아보고 많은 관중들 앞에서 기립박수를 받으며 떠나길 바랬는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가넷에게 왜 애정을 가지고 있느냐? 

청소년기에 같은 또래의 여학생들에게 동방신기가 우상이었고 절대적인 영웅이었다면 저에게는 케빈 가넷이 우상이었고 절대적인 영웅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감정적인 성격을 지닌 그와 저는 닮은 부분이 있었고 그러한 점 덕분에 가넷에게 더욱 빠져들었죠. 실제로 어렵고 힘든 일들을 겪었을 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던 가넷의 모습에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고3 수험생때 한창 스트레스와 싸우고 있을 때 여러 번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많았고 공부를 강조하는 주변 사람들과의 마찰로 지쳐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가넷은 보스턴 셀틱스에서 폴 피어스, 레이 알렌과 함께 우승을 향한 인생일대기의 도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가넷도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보내고 있었죠. 틈틈히 보스턴에서 뛰고 있는 가넷의 모습을 보면서 응원했고 저도 힘내야겠다는 생각을 다 잡으면서 힘든 시기를 이겨냈습니다. 가넷은 결국 그렇게 꿈꿔왔던 정상에 오르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Anything is possible을 외치며 눈물을 쏟아냈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해서 마침내 정상의 자리에 오른 가넷의 모습에 힘을 얻은 저는 수험생 기간을 무사히 이겨낼수 있게 해줬습니다. 케빈 가넷을 알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전 방황하다가 전혀 다른 삶을 살았겠죠. 저에게 있어서 케빈 가넷이란 그렇게 특별한 선수였습니다.




가넷이 보스턴에 입단했을때 모아놨던 용돈과 저금통을 털어서 샀던 져지입니다. 요즘 이 져지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군요. 한동안은 이 져지만 입고 농구하러 다닐 것 같네요.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많았고 적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살짝 눈물이 나서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떠나 보내는건 너무나 안타깝지만 21년간 꿈을 위해 달렸던 전사에게는 이제 휴식이 필요한 순간이 왔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가넷의 성장하는 모습과 최전성기, 암흑기, 꿈에 그리던 그의 우승하는 모습, 그 이후의 도전기와 다시 친정으로 돌아온 과정까지 모두 볼 수 있었던 전 행운아였고 행복했습니다. 이제 가정으로 돌아가 제2의 인생을 잘 보내길 바랍니다.









Kevin Garnett



수상내역


2007-2008 NBA Champion (1)

NBA Most Valuable Player (2004)

15× NBA All-Star (1997, 1998, 2000–2011, 2013)

NBA All-Star Game MVP (2003)

4× All-NBA First Team (2000, 2003, 2004, 2008)

3× All-NBA Second Team (2001, 2002, 2005)

2× All-NBA Third Team (1999, 2007)

NBA Defensive Player of the Year (2008)

9× NBA All-Defensive First Team (2000–2005, 2008, 2009, 2011)

3× NBA All-Defensive Second Team (2006, 2007, 2012)

NBA All-Rookie Second Team (1996)

J. Walter Kennedy Citizenship Award (2006)

4× NBA rebounding champion (2004–2007)

2000 Sydney Olympic Gold medal
1999 FIBA Americas Championship Gold medal
Mr. Basketball USA (1995)
McDonald's All-American Game MVP (1995)
Illinois Mr. Basketball (1995)



커리어 스텟





"Thank you KG. Good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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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I Love NBA
글쓴이 : Jerry Slo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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