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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기굽는 KBL 스토리] 전설의 그가 나타났습니다. 백년만에.. 그리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선수

나비넥타이 2017. 3. 11.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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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굽는 KBL 스토리]



놀라셨나요?


NBA게시판에 제 지분이 꽉 차있어서 글이 내려가길 기다리며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수속을 끝내고..


사실 갑자기 국내선으로 돌아온 것이라 누구를 선정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사실..


누가 있겠습니까?

















국내선의 최강자


















하지만 국내선수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던 선수들을 보여드리면 될 것 같아서


제 페이보릿 라인업을 써봤습니다


1. 허웅 아빠


2. 허훈 아빠


3. 이미수 남편


4. 허재가 농구허재 (젠장)


갑니다 고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별명들


1. 농구대통령


2. 농구 9단


3. 우리나라 선수중 NBA에 갔어도 성공했을 선수


4. 뭔 소리야 말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블라블라


5. 농구는 몰라도 허재는 안다



5번은 제가 지어낸 겁니다 (커밍 아웃) 아무튼 이런 말들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


허재에 관한 글을 쓰다니 최소 1시간은 잡아 먹겠군요


지금은 2:50을 넘기고 있습니다





1965년생 188cm 강원도 춘천


상명초 - 용산중 - 용산고 - 중앙대 - 기아차 - 기아엔터프라이즈 - 원주TG (선수) KCC (감독)


농구대잔치 11시즌 통산 5352점, 리바운드 1428개, 어시스트 758개


프로농구 8시즌 통산 3581점, 리바운드 1009개, 어시스트 1365개


농구대잔치 7회 우승, MVP 3회 수상, 영구결번 (NO.9) 국제대회 무관의 제왕 (95년 ABC 대회 MVP)


1987년 농구대잔치 중앙대 VS 단국대 75득점 (한 경기 최다득점 1위)


1990년 세계 농구선수권 VS 이집트 전 62득점 (한 경기 최다득점 1위)



허재는 소년시절부터 체력이 장사였고 힘도 아주 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다른 골격에 후천적 노력이 곁들여져 프로생활 내내 큰 부상없이 커리어를 이어왔죠

88올림픽 당시 전체 선수들 체력검정 당시 1위를 차지했다고 전해지는데 어떤 분야의

검정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런 이야기만 들어보아도 그의 체격과 체력을 알 수 있죠










선수 시절 허재를 막기 어렵다보니 더티하게 왼손을 때리거나 부상을 입히려 위해를 가하는 등의

몰상식한 플레이를 서슴치 않았던 적도 있었죠. 왼손을 부상시키니 오른손으로 득점하는 모습을 보고나서

할말을 잃었다고 전해집니다 (사실 허재는 원래 오른손잡이 입니다. 농구를 위해 왼손을 사용하게 된 것인데

이 또한 놀랄 일이죠. 크리스 폴이 예전 우리나라에도 존재했던 것입니다!)


사실 허재는 5TOOL 플레이어 원조이자 마지막 선수였습니다. (낙생고의 정훈이 그렇게 될 줄 알았던 사람볼줄 모르는 1인)

그는 한국 농구역사를 바꿔놓을 선수로 비춰졌고 그 기대를 충족시켰습니다


농구를 워낙 잘했으니 가장 못했던 적이 4강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뽐냈었죠

용산고는 특히나 대학무대에서도 명성이나 위력을 떨칠 지경이었으니까요

용산고 시절에도 잘하는 선수들이 곁에 있었지만 그의 곁에는

중앙대 시절에 맺어진 베스트 선수들이 오랜시절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허재는 용산고 시절부터 차세대 특급 가드라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고연 스카우트를 뿌리치고
정봉섭 감독의 중앙대로 진학합니다. 농구대잔치 첫 시즌부터 팀의 포인트 가드로 활약하며 무시무시한
커리어의 시작을 뽐내기 시작합니다.

첫해
(대학교 1학년 기록 : 경기당 39분 30초 출전 / 평균 24득점 8리바운드 6어시스트)
신인상, 어시스트상, 인기상 수상

김승현이나 류현진이나 되어야 비벼볼 수 있을까요? 홍명보나 선동렬 정도?

1985년 농구대잔치에선 성인 선수들로 이루어진 실업팀들을 제치고 김유택, 한기범과 함께 중앙대 농구팀을
농구대잔치 최종 결승전까지 이끌었지만, 당시의 허재보다 더 괴물이었던 이충희의 가공할 득점포 앞에
중앙대는 결승에서 현대에게 격파 당했습니다.

(한편 이 결승은 이충희의 가공할 득점포가 최고 승리 원인이긴 해도 현대 선수들의 폭력을 동반한 수비와 신경전,
그런 폭력을 묵인한 편파 판정이 상당한 물의를 빚은 경기이기도 합니다. 당시 중앙대 측이 너무한 판정에 항의하며
경기 막판에 우두커니 서서 경기를 포기하기까지 했으니까요.. 한국 농구의 어두운 그늘이기도 합니다)


1986년부터는 강동희가 입학하면서 슈팅가드 쪽으로 활약, 강동희와 함께 다시 한번 중앙대 농구부를
농구대잔치 최종 결승까지 이끌었지만, 또 한 번 이충희와 현대에게 물을 먹으며 우승에는 실패합니다


대학 4학년 때는 한기범도 김유택도 졸업하고 없는 팀 상황에서 센터로 활약, 대학농구 대회에서
단국대를 상대로 전반에만 팀 전체 득점인 54점, 최종적으로 75점을 넣는 기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4학년 시즌에는 중앙대가 선수들의 부상으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며 농구대잔치 출장을 거부했기에
농구대잔치에서의 마지막 시즌의 기록이나 활약은 없습니다  


당시 실업팀들은 계약금으로 몇 억 식을 불러대며 허재를 자신들의 팀으로 스카우트하려 했으나,
허재는 정봉섭 감독의 영향 하에 대학 선배인 김유택과 한기범이 있던 기아자동차에 입단했습니다.






당시 기아는 이미 연세대와 중앙대의 특급 선수들을 스카우트해 유재학 정덕화 한기범 김유택이란
막강한 선수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여기에 허재가 합류하면서 화룡점정이 되었고, 그해 농구대잔치에서
기아는 첫 패권을 차지하며 그야말로 무적의 팀으로 군림했습니다.

허재 역시 그렇지 않아도 높던 인기가 폭발하며 당대 최고의 스타 중 한명이 됩니다.


1989년, 1990년, 1991년 기아자동차와 허재의 무적시대는 계속되었고 1990년에 굴지의 가드 유재학이 은퇴로
팀을 떠났으나 강동희가 빈자리를 더욱 잘 메우면서 이른바 허동택 트리오를 결성, 기아는 더욱 강력한 모습을 보였죠.

하지만 1990년 무렵부터 허재는 매너리즘에 빠진 채 안티 팬들의 폭발 끌기 좋은 모습들을 계속 드러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연세대 고려대, 현대 기아라는 전통적인 농구 구도에 갑툭튀한 존재라며 허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거기다 허재의 개인기를 이용한 공격에 대해 ‘저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면서
반감을 표출하는 해설이 있을 정도로 허재의 농구 스타일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1990년 무렵부터 허재는 XX은행 등의 이름들을 가진 금융권에 속한 약팀들을 상대로 전날 먹은
술이 덜 깬 건지 뭔지 흐리멍텅한 모습으로 경기에 임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면서 골수 농구 팬들의 반감을 이끌어냈고,
그러다가 허재가 있는 팀이 지면 차라리 속이 시원할 텐데 흐리멍텅하게 놀다가 경기 막판에야
술 깼는지 정신 차려서 경기에서 승리하고 상대팀은 분루를 삼키며 코트에서 물러나는 양상이 벌어지니
보는 사람들은 더욱 열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심심하면 음주사고를 일으키고 음주운전 사고까지 일으켜 경찰 신세를 지며 언론에 실리기도 했고,
1992년에는 항명 파동으로 당시 기아자동차의 감독이던 방열을 팀에서 떠나게 만들었으며,
1993년에는 훈련에 임하는 자세와 사생활이 불량하다며 국가대표에서 제외되는 일까지 생기며
더더욱 안티 팬들이 증가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 시기 허재는 그야말로 [저 썩어빠진 놈이 우리나라 최고의 농구선수다] 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을 정도였죠      

허재는 당시 자신이 고연대 출신이 아니라 중앙대 출신이라 이런 꼴을 당한다고 항변도 했는데,
당시 이런 저런 편파판정 문제 등을 보자면 허재가 고연대 출신이 아니라 불이익을 당했다고 볼 면도 있긴 하나,
술 먹고 사고 치기를 반복한 끝에 징계 먹은 건 중앙대 출신이니 뭐니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죠.

오죽하면 대학 시절 은사인 정봉섭조차 이 시절 허재의 징계에는 동의했을 정도니까요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최전성기였던 시절은 허재에게 슬슬 위기가 다가오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기아자동차 팀 내에서 연세대 출신과 중앙대 출신간에 갈등이 생겨나면서 기아는 제대로 된 선수 수급을
못하게 되었는데, 기아자동차의 창단 멤버들이 은퇴해 나가자 전력 보충이 안 되어 허재를 비롯한 베스트 멤버 이외엔
믿을 만한 선수가 없어졌고, 결국 주전 멤버들에게 지나친 체력 부담이 가해졌습니다.

거기다 김유택이나 한기범은 부상 속에 1990년을 기점으로 크게 내리막길을 쳤고, 허재 역시 1991년 무렵 무릎 부상을 당하며
운동능력을 어느 정도 잃어버리게 되었죠. 거기다 전체적으로 선수 관리가 부실하던 실업 농구 시대만 해도 한국 나이로 30은
은퇴의 갈림길로 인식되었고, 허재는 그때 기준으로 슬슬 노장 축에 드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문제점들은 1993년 농구대잔치 시기에 폭발, 허재와 기아자동차는 팀 동료이던 강정수가 감독을 맡은
학교 후배 중앙대에게 농구대잔치 플레이오프에서 패하는 굴욕을 겪고 맙니다.


이렇게 위기 상황이 오자 허재는 정신을 좀 차리기 시작했고, 결혼을 통해 정신적인 안정을 얻은 것도
허재가 자신의 농구를 추스르는 데 한 몫을 했습니다.

결국 허재는 1994년 농구대잔치에서 당시 사기에 준하는 주전 라인을 꾸린 고려대를 꺾고 농구대잔치 결승에 진출,
서장훈에게 테러를 가한 덕에 결승에 올라와 김현준이 최후의 불꽃을 태우던 삼성을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김유택 강동희가 돌아가며 삼성을 두들긴 후 허재의 원맨쇼로 결승을 마무리하며
허재는 여전히 자신의 능력이 대단함을 입증했습니다. 서장훈도 못 이긴 삼성을 깼죠 (못 이긴건 아니지만..)


1995년 농구대잔치는 드디어 기아의 시대가 끝나는가라고 농구팬들이 생각했던 시즌이었습니다.
고려대는 신기성 김병철 양희승 현주엽 전희철이라는 올스타 라인업을 만들어 농구대잔치 정규시즌에서 전승을 거두고,
상무는 이상민을 필두로 대거 입대한 스타 선수들로 역대 최고 수준의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김영만이 새로이 합류했지만 기아자동차의 멤버들은 부상과 체력저하에 시달리며 몇 번이나 패배를 겪으며
겨우 겨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플레이오프에서 기아가 살아남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위기가 오자 허재는 정신을 좀 제대로 차렸습니다. 김유택의 주도로 팀 전원이 머리를 짧게 깎으며
정신을 다잡은 상황에서 허재는 플레이오프 8강에서 SBS를 상대로 50점을 몰아넣으며 자신의 위력을 재차 보여주기 시작,
4강에선 정규시즌 전승을 거둔 고려대를 격파, 결승에선 이상민이 이끄는 상무까지 격파하며
다시 한번 농구대잔치 우승을 거두었습니다.


1996년 여름, 허재는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상태에서 또 다시 무면허 음주 운전을 저질러 체포 후 구속 기소되어

포승줄에 묶이는 꼴을 겪었습니다. 97년 징계가 풀렸음에도 경기에서 벤치를 자주 지켰고 프로원년 우승은 차지했으나

강동희가 MVP에 올랐죠. 이 일로 국가대표자격 영구 박탈을 당했고, KBL 출범 전 자신이 최후로 출전할 수 있었던

농구대잔치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1997 프로 원년, 허재는 프로 원년에 포인트가드부터 스몰포워드 역할까지 해내고 외국인 선수를 상대로도
개인기로 농락하는 모습까지 보이며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팀 내에서 허재는 더 이상 예전같은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기아의 감독인 최인선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가드로서 패스를 해줄 선수로는 강동희가 있었고 주요 득점원으로는 김영만이 있었고 인사이드 득점원으로는
외국인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즉, 실업 시절처럼 허재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었죠. 허재는 자신의 비중이 줄어드는 데 반발했으나,
최인선 감독은 프로농구 원년 챔피언결정전 최종전에서 허재를 전혀 기용하지 않고도 팀을 승리로 이끌어 내며
허재가 팀 내에서 잉여물임을 증명해냈고, 최종 결정전에서 관중들은 허재를 연호했으나 허재는 단 1초도 코트 위에 서지 못했죠.

97-98 시즌, 허재는 기아자동차를 떠나기로 맘먹고 그 이전에 자신의 힘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끈 후 명예롭게 떠나려 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고 챔피언 결정전 상대인 이상민과 맥도웰이 버틴 현대는 사람들이 드디어 기아의 시대가 끝난다고

생각할 정도로 강했고, 기아는 외국인 선수 저스틴 피닉스의 태업으로 인해 인사이드에서 절대 열세에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암튼 피닉 뭐시기 들어가는게 문제네 문제..)






거기다 허재는 플레이오프에서 손등이 부러지는 부상까지 당했습니다. 기아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허재 스스로가 이 이상 최악의 상황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의 결승전에서, 허재는 자신이 왜 농구 대통령인지 입증했습니다


인사이드에서 절대 우세에 있는 현대가 허재 단 한 사람에게 휘둘리며 패배를 거듭했고, 손에 깁스를 하고 눈덩이가 찢어져도

코트에서 달리고 득점하는 허재를 보고 허재에 대해 비판하던 사람들조차 말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7차전에 이르면서 허재가 자신의 모든 걸 짜내는 데도 한계가 왔고, 결국 허재는 팀을 우승시키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챔피언 결정전 MVP는 우승팀의 이상민, 맥도웰이 아니라 허재!! 였습니다


시즌 후 허재는 정인교와 트레이드되어 나래 블루버드로 팀을 옮겼고,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면서 활약을 펼쳤습니다.
누가 막아도 상대가 어느 팀이라도 허재 단 한명의 힘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지만, 이미 허재는
시즌 내내 그런 활약을 펼칠 수는 없는 나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패배가 쌓여가면서도 허재는 다시 한 번 우승을 맛보겠다며 코트 위에서 버텨 나갔고, 코트 위 최고의 노장이 되어가면서도
자기 관리 속에 활약을 하고 자신이 부족해진 걸 인정하며 팀의 요구에 허재는 자신을 맞추어 갔습니다.


그러던 끝에 마침내 중앙대의 김주성이 드래프트로 입단하고 데이비드 잭슨이 팀에 합류했고,
허재는 공격기술이 부족한 김주성에게 포인트가드로서 최고의 패스를 공급하고 데이비드 잭슨을 어르고 달래며
팀을 승리로 이끌어 갔습니다.

김승현과 마커스 힉스가 있는 전 시즌의 우승팀 오리온스를 상대로 허재는 코트 위에서 갈비뼈가 부러져 가며 투혼을 불살랐고,
결국엔 KBL 우승을 맛보았습니다.


허재는 2003-2004 시즌이 끝난 후 은퇴했습니다. 은퇴식까지 크게 치루며 축복을 받은 명예로운 은퇴였지만,
은퇴는 팀이 허재도 모르게 발표했고 허재는 결국 그것에 따랐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학생 때부터 국가대표로 발탁, 강동희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국가대표 포인트가드를 맡았습니다.

포인트가드를 맡는 한편 상황에 따라 파워 포워드까지 맡아야 하기도 했으며, 장신인 팀을 상대로도
위력적인 돌파를 잘 선보였습니다. 강동희가 국가대표가 된 이후론 슈팅가드 자리에서 뛰었죠





아시아선수권에서 중국한테는 이겼는데 필리핀에게 패배하며 우승을 놓친 일도 있고, 아시아선수권 결승전에서
중국을 상대로 맹활약하다 중국 선수 후웨이동의 에이스 킬러 짓에 나가떨어지고 결국 한국팀이 패배한 일도 있고,
아시아선수권 준우승인데 MVP를 받은 일도 있고,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그래도 중국을 따라가게 팀을 이끌다
5반칙 퇴장당하고 결국 대표팀이 패배한 일도 있고 등등, 여러 모로 에이스다운 활약을 했고 중국에게 승리한 일도
몇 번 있지만 아시아선수권 우승이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거나 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결국 허재는 한계 있는 선수라며 비판받기도 하죠. 허재가 없던 1997년 대표팀이 아시아선수권 우승을
차지한 일도 있고 하니. 하지만 중국팀이 에이스 킬러 짓을 불사할 정도로 활약했다는 건 마냥 허재를
무시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세계대회에선 괜찮은 모습을 보인 편입니다. 1990년에 이집트를 상대로 62점을 올린 건 세계선수권의 단일 경기 득점 기록 중
1위이고, 1994년 세계대회에서도 19점대의 득점에 스틸 1위를 차지하는 한편 돌파 이후 빼주는 패스로 서장훈의 중거리슛이나
문경은의 3점슛 기회를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세계대회에서 허재는 대단한 활약을 보인 경기도 있지만 90년 세계 선수권에서 팀의 주 득점원임에도 미국 상대로
단 9점에 그치며 참패의 원흉 증 한 명이 되거나 그리스 상대로 단 4득점에 그치거나 캐나다 상대로 단 2득점을 기록하는 등
부진했던 경기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허재 이후, 국제 대회에서 허재만큼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선수는 많이 않은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허재는 역대 한국농구 선수 중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립니다. 

기본기에 충실한 드리블부터 페이크 동작을 섞은 화려한 드리블까지, 비하인드 백 드리블이나 유로스텝까지..
드리블에 순간적인 스핀 무브에 크로스오버까지 온갖 드리블 기술을 능숙하게 썼으며, 왼손잡이임에도
오른손잡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오른손을 잘 썼고,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좌우 어디로도 돌파할 수가 있었죠.

그렇게 돌파한 후 양손을 사용해 어느 방향으로든 레이업을 올려 넣었으며, 높은 점프 후 체공 시간을 이용한
더블 클러치는 비슷한 수준의 선수가 그 뒤로도 찾기 힘들었습니다.

드리블과 스피드를 살려 볼을 잡자마자 순간 단독 속공으로 치고나가면 두 세명의 수비수가 있어도 상대 팀은
파울이 아니면 막을 방법이 없었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패스의 경우 돌파 능력과 연계해 수비수를 모은 후 밖으로 빼주는 패스부터 해서, 인사이드로 안정적으로 넣어주는 엔트리 패스,
감각적인 노룩패스, 속공 상황에서 빠르게 앞으로 찔러주는 패스까지 각종 패스도 훌륭했습니다.

특히 운동능력과 농구 센스가 좋은 동료가 적극적으로 움직일 때 거기 딱 맞춰서 빈 공간에 빠르게 넣어주는 패스가 일품.

이런 패스와 드리블 능력 때문에 슈팅가드로서가 아니라 포인트가드로서의 허재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허재가 나이를 먹어가며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면서 허재의 이러한 패스 능력은 더욱 빛을 발했고,
은퇴 직전까지도 팀 내에서 가장 패스 잘 하는 선수는 허재였습니다.

한편 운동 능력을 살려 위로 확 솟구치는 듯이 쏘는 점프슛부터 턴어라운드 페이더웨이, 풀업 점퍼 등 각종 슛에서도
출중했고 물론 슛 정확도로 치면 이충희같은 괴수보다는 밀리지만, 역대 가드 포지션의 선수들 중 최고의 포스트업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포스트업 기술이 웬만한 센터보다도 나을 정도였죠. 은퇴 직전에 이르러서도 포스트업으로 손쉽게 득점을 해내기도 했습니다.
은퇴 직전 즈음 되면 계속 포스트업을 할 체력이 없는 게 문제였지만 나이를 먹었으니..

거기다 공을 가진 상태에서의 공격만이 아니라 공이 없는 상태에서의 움직임도 탁월했고, 항상 호흡을 맞춰 온
강동희와 김유택이 찔러 주는 패스를 받아 백도어 플레이를 해내거나 같은 팀의 스크린을 이용해 빠져나온 후
슛을 넣는 전형적인 슈터 플레이에도 능했습니다.

일대일 수비와 상대 패스의 맥을 읽고 중간에 끊어내는 스틸에도 능했고, 특히 스틸은 역대 최고 수준.

이런 기술들을 떠받친 게 허재의 신체. 188이란 키는 2000년대 기준으로도 슈팅가드로서 작다 할 수가 없는데
허재가 대학 다니던 무렵만 해도 180대 후반의 인사이더가 흔했습니다. 즉 허재의 대학 시절로 치면 센터를 봐도 되는 키였죠

허재 이전에도 신동찬이란 190대 포인트가드가 한국에 있었고 허재 이후에도 일단 은희석이나 기타 몇몇 선수 등
포인트가드에서 슈팅가드에 걸쳐 허재 급의 키를 가진 선수가 없었던 건 아니나, 허재는 비슷한 덩치의 선수들을
압도하는 스피드와 점프력 순발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운동능력 덕에 대학 때만 해도 경기중 덩크를 했는데, 운동능력 떨어진 90년대에 와선 대표팀에 소집되어 훈련 중
덩크 시범 보인다고 하다가 부상당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거기다 원래 탄탄했던 몸에 계속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을 더 붙여서 힘까지 좋았는데 유연성도 갖췄죠

운동능력만 치면 허재 이상의 선수들이 있고 키만 치면 허재급의 키를 가진 선수가 여럿 있는데, 키와 운동능력과
힘의 조화로는 허재가 성인 농구계에 등장한지 20년이 넘었음에도  이후 허재급이라 할 만한 선수가 거의 없습니다.
방성윤이 그나마..? 하승진? 음..? 그런 하드웨어에 최고의 기술이 겸비되었으니 저런 활약을 했던 것이죠

거기다 위기에 몰릴수록 강해지는 정신력이 몸과 기술을 이끌었습니다. 권투선수 생활을 한 아버지에게 어릴 적부터
스파르타식 단련을 받은 탓에 마치 헝그리 복서같은 정신력과 독기가 길러졌고, 이것이 허재가 선수 생활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헤쳐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한편 90년대 초의 나태함 이전에는 연습벌레로도 유명했습니다. 양손 드리블을 제대로 하겠다고 한쪽 손을 묶어놓고
연습을 하는 기행에 가까운 연습도 했고, 스스로 머리를 삭발하고 연습만 하기도 했습니다.

각종 기술들도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니라 NBA 쪽 비디오 등을 참고하며 자신만의 연습으로 만들어 나갔고,
그외 여러 기술들도 누군가의 가르침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이 만들어내 익혀나간 게 많았습니다.

그야말로 천재란 별명에 걸맞는 모습이었죠

상대 팀들이 허재를 막기 위해 폭력을 불사하는 거친 수비를 한 일이 많고 그 때문에 코트 위 폭력 사건에 휘말린 일이 많았는데
한데 때린 일은 거의 없고 맞기만 많이 맞은 편이었습니다.
 
허재가 얽힌 폭력 사건으로 유명한 게

1. 1990년 기아와 현대의 사건 (1. 임달식 + 김성욱 사건) 

허재를 마크하던 임달식이 스크린을 걸면서 허재에게 팔꿈치 공격을 가했고, 심판이 그냥 넘어가 버리자 이거에 맞은 허재가
임달식에게 머리를 들이대며 소리를 질렀으며, 그러자 임달식이 냅다 주먹을 허재에게 휘두른 것.

그런데 허재는 일단 맞기만 했는데 심판이 동시 퇴장을 선언했고, 이 때문에 허재가 소리를 지르며 항의하자
현대의 센터인 김성욱이 냅다 달려와 허재에게 주먹을 휘두르면서 코트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었던 게 당시 사건입니다.

허재 입장에선 억울하게도 허재는 맞았는데 원인 제공자라며 6개월 선수 자격 정지를 당했고, 임달식은 1년 자격 정지를 받아
직후 은퇴를 했습니다.

2. 1991년 기아와 현대의 사건 (2. 김광 사건)

1991년에는 당시 현대의 선수이던 김광에게 경기 중 얼굴을 얻어맞아 전치 3주의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선
아예 김광을 형사상 고소하기도 했으며, 김광은 구속처리 되었습니다. 한데 이렇게 고소까지 했던 김광을 허재는
코치로 받아들여 2011시즌까지도 KCC이지스에서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코트 위 폭력 사건으로는 맞은 일이 많지만 허재의 성격이 좋은 말로 화끈하고 나쁜 말로 욱 하는 성격이란 말은
나름 유명한 편입니다. 선배라 해서 가리지 않고 성질을 내며 들이댄 일도 많습니다.

그래도 결혼 후 아내까지 부끄러워지니 성질을 죽이기 시작했다고 방송에서 말한 일이 있고, 감독이 된 이후로는
성질을 정말 많이 죽였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우리가 자주 보던 그 모습이 죽인 성질입니다 ^^; 

술 관련해서 사고를 친 일이 꽤나 많죠.

선수 생활 부분에서 언급했듯 90년대 초에는 술 관련 사고로 꽤나 언론을 탔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해서도
음주 사고로 선수생활 6개월 정지라는 징계를 당했습니다. 1996년 일의 경우 언론의 과장이 있었고 과한 음주도
없었다고도 하지만, 그래도 숙소를 빠져나가 술 마셨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가 없으니..

감독으로썬 우승과 준우승도 하고 선수 운도 좋고 국가대표 감독도 하고..

감독으로서 평가는 좋은 편입니다. 













길었네요. 허재 선수에 관한 글은 수십편을 써도 모자랄 정도이죠. 그러니 이쯤에서 멈춰 보겠습니다 ^^

두시간동안 글을 쓰다보니 제가 무슨 임요환도 아니고.. 키보드가 너덜너덜 해 질 지경이네요


출처 : I Love NBA
글쓴이 : 고기굽는 데이빗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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